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2011년 4월5일. 미얀마의 전두환?
지난 2월1일 미얀마에서 군인들이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이 쿠데타를 주도한 자는 민 아웅 흘라잉 미얀마군 총사령관입니다. 2011년 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뒤 소수민족을 학살하며 악명을 떨친 그는 이제 소수민족들만이 아닌 자국 국민들 전체를 대상으로 학살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훌라잉은 미얀마에서 등장한 최초의 군사 독재자가 아닙니다. 그에겐 여러 선임(?)들이 있죠. 그들 중 맞선임(?)에 관한 기사가 1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 실렸네요.
“‘20년 철권통치’ 탄 슈웨 퇴진”이라는 제목의 기사인데요. 제목대로 그는 당시까지 “20년간 철권 통치”를 해 온 군사 독재자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퇴진하는 이유가 좀 의외입니다. 기사는 그가 “4일 모든 권력을 민간 정부에 양도하고 은퇴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해 전인 2010년 아웅산 수치 여사의 가택연금을 해제하고, 20년 만에 처음으로 선거를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왜 “민간에 권력을 양도하겠다”고 했을까요? 그는 진심으로 미얀마의 민주화를 바랐던 걸까요? 또 그의 결정이 실제로 미얀마에 짧은 기간이나마 민주 정부가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됐을까요?
슈웨는 자신이 직접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은 인물은 아닙니다. 그는 1988년 ‘군사 정권 내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잡았던 또다른 군인 ‘소 마웅’의 뒤를 이어 1992년부터 최고 권력자가 됐습니다. 그러나 그는 쿠데타를 일으켰던 선·후배들 못지 않았습니다. 그도 훌라잉처럼 1953년 입대한 이후 소수민족의 반란을 진압하며 군내에서의 입지를 다졌고, 1988년 일어난 민주화 운동인 ‘8888항쟁’ 당시 시민 3000명이 이상이 숨졌던 진압 과정에도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권력을 잡은 후엔 ‘부패 척결’을 명분으로 대규모 숙청을 자행했고, 군사정부를 비판하는 이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했습니다. 애초에 수치 여사를 가택 연금한 장본인도 슈웨였습니다. 요즘 미얀마 군부가 실시하는 ‘인터넷 차단’도 그가 먼저였는데요. 구글 등의 주요 포털사이트 접속을 차단시켰으며, 2005년까지는 아예 인터넷 홈페이지 개설 자체를 막았습니다.
그랬던 그가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기로 결심한 건 분노가 극에 달한 민심과 국제 사회의 압력 때문이었습니다. 2007년 또 한번의 대규모 민주화 운동인 ‘샤프란 항쟁’이 일어나자 그는 유혈 진압에 나섰고, 그 과정에서 일본인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가 사망한 것 등을 계기로 국제사회의 경제제재가 가해집니다. 2008년 태풍 ‘나르기스’가 미얀마를 덮쳐 수십만명의 사상자와 100만명에 달하는 이재민이 발생했는데도 그는 국내 실상이 해외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국제 원조조차 거부했고, 민심의 분노는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민간에의 권력 이양’을 약속합니다.
그러나 그에겐 복안이 있었습니다. 일단 헌법을 고쳤는데요. 국방장관과 내무장관, 국경보안장관의 지명권을 대통령이 아닌 군 최고사령관이 갖게 했습니다. 군 통수권을 대통령이 아닌 군 최고사령관이 갖는 미얀마에서 이같은 개헌은 사실상 민간 정부로부터 군은 물론 경찰력 등 일체의 국가 무력에 대한 통제권을 박탈하는 조치였습니다. 또 외국인과 결혼한 이는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수 없도록 해 수치 여사의 출마도 막았습니다. 그리고 군부의 동의 없이는 이런 헌법을 바꿀 수조차 없게 했는데요. 개헌 정족수를 ‘재적 의원의 75% 이상 찬성’으로 바꾸는 동시에 선거 결과에 관계 없이 군부가 의회 의석의 25%를 할당받게 한 겁니다.
또 앞서 소개한 대로 2010년 ‘20년 만에 선거를 허락’했지만 그의 통치 하에 치러진 선거에서 당시 수치 여사가 이끄는 NLD(민주주의민족동맹)등 야당 세력들은 배제됐고, 군부가 지지하던 USDP(통합단결발전당)이 승리합니다.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도 군인 출신이었고요. “모든 권력을 민간 정부에 양도”하는 척만 했던 셈입니다. 이 때문에 국제사회는 실제 미얀마의 민주화 시점을 이때가 아닌 NLD가 자유 총선거에서 압승을 거둔 2015년으로 봅니다.
사실 슈웨는 ‘미얀마 민주화의 계기’는 커녕 ‘미얀마의 민주화가 무너지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훌라잉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탄 슈웨가 개정한 헌법에 대한 개정 요구’였기 때문입니다. NLD측은 지난해 총선 승리를 바탕으로 군부의 의석 할당 비율 25%를 점진적으로 낮추자는 개헌 요구를 군부에 했고,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가 총선 결과에 시비를 걸며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부의 쿠데타가 너무나도 손쉽게 성공할 수 있었던 것 역시 ‘탄 슈웨의 헌법’에 의해 민간 정부가 국가 무력에 대한 통제권을 완전히 상실해 반란군에 대항할 무력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권력 유지를 위해 헌법에 손을 대고, 정치적 라이벌을 가택 연금시키고, 군 출신의 후임자에게 권력을 물려주며 ‘민간에 권력을 이양하는 척’하는 모습들은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그가 한국 선배(?)들을 보고 배웠던 것일까요? 그건 알 수 없지만 반대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설들이 존재합니다. 박정희와 전두환이 미얀마의 선배(?)를 보고 배웠다는 거죠. 그 선배는 바로 ‘네 윈’인데요. 1958년 미얀마의 첫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그는 “사회혼란을 수습한 후 병영으로 복귀하되, 이후 민간정부를 감시·감독하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그는 잠깐 ‘복귀’했다 재차 쿠데타를 일으켜 권좌에 눌러앉았습니다.
일설에 따르면 박정희는 5·16을 준비하면서 곧잘 ‘네 윈식 쿠데타’를 언급했다고 합니다. 노태우에게 권력을 이양해 안전을 도모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했던 전두환 역시 군 출신 후임자에 대통령직을 넘겨준 뒤 집권당 당수 자격으로 막후에서 실권을 행사하던 네 윈을 참고했을 것이라는 시각도 있습니다. 사실이라면 미얀의 비극을 ‘남일’로만 여길 수는 없을 것도 같습니다. ‘탄 슈웨의 헌법’이 성공할 경우, 한국에서 그걸 따라하려는 자가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 100% 장담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