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4월 21일 30대기업 주력업종 선정
1991년 4월 21일자 경향신문은 ‘30대 재벌 판도 변화 예고’라는 제하에 업종전문화 정책에 대한 기사를 실었습니다.
당시 노태우 정부가 추진한 ‘업종전문화 정책’에 따라 대기업들은 성장가능성을 저울질해 3개씩 주력업체를 골라야 했습니다. 시행을 목전에 두고 각 대기업들이 수많은 보유 업체들 중에 어떻게 주력 업체를 골라내느냐에 골몰한 상황이었죠.
‘업종전문화정책’은 1990년대 노태우, 김영삼 정부의 대표적인 산업조직 정책의 일환이었습니다.
‘재벌’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문어발식 족벌 경영은 전후 정경 유착이 낳은 한국 특유의 현상입니다. 1960~70년대 정부의 대폭적인 지원 속에서 성장한 국내 대기업집단은 ‘비관련 다각화(한 기업이 서로 관련이 없는 업종, 예를 들면 유제품과 패션, 중공업 등을 함께 경영하는 식으로 사업을 다양화 하는 것)’의 특징을 강하게 나타냈습니다. 이런 형태는 국내에서만 경쟁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시장의 선택을 받는 과정에서 고도화된 해외 기업과 경쟁 자체가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이에 세계화 추세에 발맞춰 대기업도 ‘잘하는 것’에만 집중하는 쪽으로 집중 산업을 선정해 장려하겠다는 것이 정책의 핵심 방향이죠.
노태우 정부의 ‘주력업체제도’는 앞선 1990년 5월부터 관련 정책 논의가 진행됐고, 정식 실시는 이듬해인 1991년 5월부터였습니다. 김영삼 정부때는 ‘주력업종 제도’라는 이름으로 이를 이어받았습니다.
주력업체제도 필요성은 1990년 전경련의 발표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전경련은 90년 5월 ‘10대기업 및 38대그룹의 부동산매각 발표’ 발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오늘의 경제 난국을 극복하고 주력사업분야의 경쟁력 향상을 위한 투자에 전념하여 각 그룹은 중복과열 시설 투자가 되지 않도록 자제하며, 각 사는 주력사업과 관련이 없는 도소매업에 대한 신규 투자를 자제한다. 기업의 투자는 주력 분야의 경쟁력 향상과 미래지향적 기술개발에 두며 기업공개와 전문경영인 체제를 촉진해간다”
하지만 대기업들이 기꺼이 자신들의 사업 분야를 좁히려할리 없었습니다. 이에 정부는 주력업종제도 정착을 위해 1991년 3월 대기업의 전문화를 위한 금융세제 지원 정책을 골자로 하는 ‘제조업 경쟁력 강화 대책’을 내놓습니다. 은행대출금 상위 30대 계열기업군 별 3개 이내의 업체를 주력 업체로 선정하면, 선정된 주력 업체들은 여신한도 관리대상에서 제외되고, 공장 및 부대시설용 부동산 취득 시 자구 의무 일부를 면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선택엔 필연적으로 포기가 따릅니다. 어떤 곳이 무슨 업종을 주력으로 삼느냐에 따라 업계가 뒤흔들릴 수 있어 서로의 선택에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현대그룹은 현대건설을 당초부터 제외시켜놓은 채 현대 자동차와 함께 유화, 정공을 선택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자연히 현대는 중공업과 전자를 어느정도 포기해야 했습니다.
삼성그룹은 당시 성장 가능성이 높은 삼성항공 등 일부 계열사 대신 삼성 중공업을 일찌감치 주력업체로 선정해 자동차생산 분야에 뛰어들겠다는 의도를 확정했다고 하네요. 럭키금성그룹은 마지막까지 금성일렉트론과 호유의 경합 끝에 금성일렉트론을 주력업체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간 경쟁사에 비해 뒤쳐진 것으로 평가받은 반도체 분야를 향후 집중 육성하겠다는 의지였습니다.
한진그룹은 주력기업인 대한항공, 한진해운 외에 한일개발을 주력업체로 선정해 종합물류기업으로 성장하겠다는 경영 의도를 내비쳤다고 합니다. 금호그룹은 모기업인 광주고속을 포기하고 석유화학을 주력업체로 선택했습니다.
주력업종 선정 결과가 향후 기업 운영에 미치는 영향이 워낙 크다보니 직전까지 여러모로 진통을 겪기도 했는데요. 극동건설의 경우 극동건설, 국제종합건설을 함께 신청했다가 “제조업도 아닌 건설업체를 2개씩 신청할 수 없다”는 응답에 국제종합건설의 신청을 철회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계열사 대부분이 식품, 서비스업종인 롯데의 경우 마감시한을 넘겨서까지 주력업종 선정에 골머리를 앓았다고 합니다. 한편 당시의 ‘부동산 광풍’을 보여주듯 10대그룹 이하에선 건설업을 주력기업으로 내세운 그룹이 5곳에 달했다고 하네요.
당시 전경련 관계자는 “당장 재계 판도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각 그룹이 앞으로 주력업체를 얼마나 효과적으로 육성시키느냐에 따라 재계의 판도는 물론 그룹 경영 성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참고자료
김용복, 업종전문화정책에 나타난 한국 산업정책과정의 특징(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