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4월24일. 대만의 ‘봄날’은 1991년 시작됐다?
미국의 정권이 바뀌었어도 미·중 간 긴장은 그대롭니다. 미국이 대중국 압박 방식을 ‘독불장군’식에서 쿼드 체제 등 ‘동맹 활용’식으로 전환함에 따라 ‘줄서기 압박’에 직면한 주변국들의 선택(?)도 이젠 국제적인 관심사가 됐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주목받는 나라가 있는데요. 바로 대만입니다. ‘하나의 중국’ 원칙을 고수하는 중국에 대만은 ‘아픈 손가락’이죠. 미국은 중국을 압박하기 위해 곧잘 ‘아픈 손가락’을 건드렸습니다. 대만에 20조원 어치의 무기를 팔았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에 이어 조 바이든 대통령은 취임식에 대만의 외교 사절을 참석시켰습니다. 사실상 대만을 국가로 대접하면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무시한 겁니다. 당시 대만의 외교 사절은 “민주주의는 대만과 미국의 공통 언어이고 자유는 공동 목표”라고 화답해 중국의 속을 긁었죠. 그런데요. 대만은 언제부터 민주주의 국가였을까요?
아시다시피 지금 타이완섬에 위치한 대만은 1940년대 말 중국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중국 국민당 세력이 타이완섬으로 건너가면서 시작됐습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공산 국가’와 대치한 ‘민주 국가’였을 것 같지만 사실 대만의 민주주의 역사는 길지 않습니다.
30년 전 이날 경향신문에는 “대만 ‘43년 비상’ 사실상 종식”이라는 기사가 실렸는데요. “대만 국민대회가 22일 전시비상법체제인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 폐지 등을 골자로 한 헌법 개혁안을 승인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개혁 조치의 배경에 대해선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로 정치체제의 현실화 압력이 강화돼 왔다”고 전합니다.
“거센 민주화 요구”가 배경이었다면 당시는 민주화가 안된 상태였다는 걸까요? 실제로 이 시기까지 대만은 사실상 1당 독재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그 주요 수단이 바로 기사에 소개된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이었습니다. 기사는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에 대해 “48년 4월 남경에서 열린 국민대회 1차회의에서 채택된 일종의 헌법 부칙으로 공산반란군 토벌을 위한 비상동원체제와 이에따른 총통에의 비상대권 부여, 대륙에서 선출된 국민대표 및 입법원위원희 사실상 종신제 등을 명기한 일종의 초헌법적 규정”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중국 국민당은 2차 대전 종전 이듬해인 1946년 ‘중화민국 헌법’을 제정했습니다. 삼권 분립 원칙을 쑨원의 ‘삼민주의’에 입각해 재해석한 ‘오권 분립(삼부 외에 감찰원, 고시원이 추가로 존재하는 형태)’, 다당제 등이 골자였습니다. 일종의 상원 역할을 하던 국민대회와 하원 격이던 입법원 등의 의원들도 직선으로 선출됐습니다. 그러나 공산당과 내전 중이던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자 당시 국민당의 장제스 주석은 ‘공산당을 토벌할 때까지 총력전 체제가 필요하다’며 ‘2년 기한’의 한시적 특별법 제정을 추진합니다. 그게 바로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입니다. 당시 헌법 제·개정 권한을 가진 국민대회의 다수 의석을 국민당이 차지하고 있어 이 부칙은 기사에 소개된대로 1948년 4월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국민당은 공산당을 ‘2년 내’에 토벌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타이완섬으로 쫓겨났죠. 장제스는 ‘공산당을 아직 토벌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이 부칙의 시한을 계속 연장했고, 임기 말엔 영구화합니다. 이 부칙이 “총통에 부여한 비상대권”은 ‘중화민국 헌법’을 무용지물로 만듭니다. 총통이 사실상 입법·사법·행정권을 장악하면서 ‘오권분립’은 유명무실했고, 명목상의 연립내각인 ‘3당 훈정’에 참여한 기존의 관제야당 2곳 외에 새로운 정당의 결성도 금지됐습니다.
장제스는 1948년부터 1972년까지 1,2,3,4,5대 총통을 지냅니다. 6대와 7대는 그의 장남 장징궈였습니다. 몇년 간의 대행 체제를 제외하면 부자가 40년 가까운 장기 집권을 한 셈입니다. 또 1954년 대만 사법부가 ‘감란의 시기라 선거가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기존 의원들의 무제한 임기 연장을 용인하면서 의원들도 장기 집권(?)에 나섭니다. 선거는 결원이 생길 때 가끔 치러지는 보궐 선거 정도가 전부였고, 초대 의석 다수당이었던 국민당은 계속 다수당이었습니다. 장기집권에 대한 불만과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1949년 선포돼 1987년까지 유지된 계엄령 하에서 억눌렸습니다.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과 계엄령의 명분은 ‘공산당 토벌을 완수할 때까지의 비상체제’였지만 사실 ‘외성인’이 ‘본성인’을 지배하기 위한 체제이기도 했습니다. 타이완섬에는 원주민 외에도 명나라나 청나라 시절부터 한족들이 건너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타이완성에 원래 살고 있었다’는 의미에서 ‘본성인’이라 부릅니다. 그리고 국·공내전에서 패해 건너온 국민당 세력을 외부에서 왔다는 의미로 ‘외성인’이라 부르죠. 소수인 외성인들이 다수의 본성인들을 지배하려 ‘외성인’들의 국민당이 1당 독재를 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대만의 민주화는 본성인에 의해 물꼬가 트입니다. 기사에 소개된 것처럼 1980년대 들어 “경제성장에 따른 국민들의 거센 민주화 요구”와 ‘공산당 토벌이라는 목표의 불가능성’ 등을 이유로 국민당 정부는 비상체제를 더 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장징궈 총통은 1986년 ‘진짜 야당’인 민주진보당의 창당을 묵인하고 1987년엔 계엄령을 해제합니다. 그러나 외성인이었던 그는 외성인 지배체제의 근간인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은 손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국민당 소속이긴 했지만 본성인이었던 리덩후이가 1988년 차기 총통이 됐고, 1991년 기사에 소개된대로 ‘동원감난시기임시조관’은 폐지됩니다. 리덩후이는 총선을 실시해 ‘종신직 의원’들의 임기에도 종지부를 찍었으며, 1996년엔 대만 최초로 총통 직선제를 도입합니다. 그리고 직선으로 9대 총통에 당선되며 3선에 성공합니다.
이후 천수이볜이 10대 총통으로 선출되면서 최초로 본성인들이 주축인 민진당 소속의 본성인 총통이 등장하게 되죠. 이후 다시 국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가 다시 민진당의 차이잉원이 총통이 되는 등 현재까지 민주적 정권 교체가 이뤄져오고 있습니다. 싱가포르는 1당 독재 국가이고, 홍콩은 중국에 의해 자치권과 민주주의 체제가 훼손된 상황에서 대만은 현재 중화권 유일의 ‘민주 국가’입니다.
대만의 민주화는 양안 문제에도 영향을 끼쳤습니다. 국민당, 즉 외성인들은 중국 공산당과 철천지 원수이긴 하지만 ‘하나의 중국’이라는 원칙은 공유합니다. 역설적으로 그래서 ‘본토 수복’이라는 목표를 수십년 간 포기하지 않은 것이죠. 그러나 본성인들은 다릅니다. 명나라 때부터 떨어져 살다보니 중국에 대한 일체감이 크지 않습니다. ‘통일’이 아닌 ‘독립’을 더 원합니다. 특히 홍콩의 ‘우산혁명’은 중국에 대한 본성인들의 거부감에 불을 질렀고, 민진당이 국민당으로부터 정권을 재탈환하게 되는 배경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거세진 대만의 독립 열망에 중국은 ‘무력 사용도 불사한다’는 엄포를 놓기에 이르렀고요.
앞서 말했듯 대만은 미·중간 대립 구도에 휘말린 관련국들 중 가장 중심에 끼어있는 국가입니다. 그러나 ‘줄서기 압박’에 골머리를 앓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대만은 이 상황이 싫지만은 않을 겁니다. 유엔에서 퇴출되고 국가 취급도 받지 못해 단교를 당하며 세계적인 ‘왕따’로 살아야했던 대만이 지금은 전례 없는 관심과 대우를 받고 있으니까요.
단지 중국의 ‘아픈 손가락’이라서 그럴까요? 중국과 가장 가까이에 있는, 중화권 유일의 ‘민주국가’인 대만은 중국과 대립하는 미국과 서방 세계에, 전략적으로도 지정학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분명 재평가할만한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대만의 ‘봄날’은 199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