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27일 공권력이 죽인 대학생 강경대

2021.04.27 00:03 입력 2021.04.27 00:04 수정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5월2일 대학생들이 강경대씨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 나선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2일 대학생들이 강경대씨의 영정을 들고 거리에 나선 모습. 경향신문 자료사진

■경찰이 휘두른 쇠파이프, 떠나간 19세 청년

1987년 1월 서울대 학생 박종철씨가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고, 그해 6월 연세대 학생 이한열씨가 최루탄에 맞아 쓰러졌습니다. 그로부터 4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91년 4월, 또 한 명의 대학생이 공권력에 의해 죽게됩니다. 명지대 학생으로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한 강경대씨(19)입니다. 30년 전 오늘(1991년 4월27일) 경향신문에는 <시위 대학생 머리맞아 숨져>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1991년 4월26일 오후 5시15분쯤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 명지대 정문 앞. 이 학교 경제학과 1학년에 재학 중이던 강씨가 실신해 쓰러져있는 것을 시위에 함께 참가했던 학생들이 발견했습니다. 이날 오후 3시부터 명지대생 500여명은 구속된 명지대 총학생회장 박광철씨 구출과 군사독재정권 타도를 요구하며 교내 집회를 가진 뒤, 오후 4시10분부터 교문 앞 2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시위를 벌이던 상황이었습니다.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대학생들을 저지했고, 학생들은 화염병과 돌멩이를 던지며 대치했습니다.

최루탄에 밀려 학교 안쪽으로 들어가던 강씨에게 달려든 건 전경들이었습니다. 전경들은 강씨를 붙잡아 쇠파이프를 휘두르며 발길질을 했습니다. 시위를 진압하고 체포하는 사복 경찰관을 일컫는 이른바 ‘백골단’이었습니다. 백골단은 무술 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으로 구성돼있었습니다.

1991년 5월18일 대형 걸개그림과 영정을 앞세운 강경대씨의 운구행렬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을 지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18일 대형 걸개그림과 영정을 앞세운 강경대씨의 운구행렬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을 지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18일 강경대씨의 노제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하는 학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18일 강경대씨의 노제에서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시위하는 학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강씨는 사람들 등에 업힌 채 교내 보건소로 옮겨졌으나 의식을 잃었고, 부근 성가병원을 거쳐 신촌 세브란스병원으로 가던 중 숨졌습니다. 강씨를 처음 검안한 성가병원의 외과과장은 “강씨가 도착했을 당시는 이미 동공과 뇌간 검사에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강씨의 오른쪽 전두부가 둔기에 맞은 듯 머리뼈까지 손상될 정도로 심하게 함몰돼있었으며 이로 인해 뇌에 충격을 받은 것 같다”며 사인을 전두부 함몰 골절에 의한 뇌손상으로 추정했습니다.

사고 발생 당시 시위 현장에는 전경 2개 중대와 사복 검거조 1개 중대가 진압에 나서고 있었으며 강씨를 폭행한 전경의 헬멧에 ‘94’라는 중대 표시가 있었다고 목격 학생들은 주장했습니다. 경찰은 진상조사에,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공안 분위기를 조성하며 정권에 반기를 드는 대학생들 시위를 강경 진압해오던 노태우 정권은 경찰 때문에 대학생이 사망에 이르자 발칵 뒤집혔습니다. 노태우 대통령은 즉각 안응모 내무장관을 경질하고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 구타에 의해 대학생이 사망한 일은 심히 유감”이라고 밝혔습니다. 검찰은 “이번 사건은 경찰이 시위 진압 수칙을 어기고 쇠파이프 등을 사용, 과잉진압한 결과로 빚어진 것”이라고 수사 결과를 발표하고, 전경들을 상해치사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그러나 파장은 점점 커졌습니다. 대학생과 시민들 수만 명이 경찰의 시위 진압을 비판하고,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매일 같이 거리로 나왔습니다. 분노한 시민들을 경찰이 또 폭력적으로 진압하면서 분노는 확산됐습니다. 범국민대책회의가 만들어졌습니다. 범국민대책회의는 “강경대 열사의 죽음은 단순히 백골단이라는 몇몇 폭력배들의 과격함에서 비롯된 돌발 사고가 아니라 노태우 민자당 정권의 장기집권을 위한 폭압적 민중탄압의 결과”라고 했습니다.

노태우 정권 출범 후 가장 큰 규모의 투쟁으로 발전했습니다. 급기야는 대학생과 재야 인사들이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분신하는 일도 벌어졌습니다. 강씨의 장례가 치러진 1991년 5월20일엔 전국 주요 도시에서 30여만명의 시민이 시위를 열었습니다.

1991년 5월의 어느날 강경대씨 사망 사건 규탄 집회를 갖고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행진하는 학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1991년 5월의 어느날 강경대씨 사망 사건 규탄 집회를 갖고 ‘노태우 정권 타도’를 외치며 행진하는 학생들. 경향신문 자료사진

그 다음엔 어떻게 됐을까요? 노태우 정권의 화살은 엉뚱하게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으로 향합니다. 투쟁 과정에서 투신, 사망한 김기설씨의 유서를 강기훈씨가 조작하고 자살을 방조했다는 의혹을 내세우며 민주화운동을 매도한 것입니다. 검찰은 강씨를 재판에 넘겼고 법원은 유죄를 선고했습니다. 강씨는 재심 끝에 24년 만인 2015년 무죄를 확정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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