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4일 ‘캠퍼스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2021.05.04 00:46 입력 2021.05.04 00:56 수정

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5월4일 ‘대학생 또 분신 절명’

1991년 5월 강경대군의 장례 행렬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 로터리를 지나고 있다. 경찰의 진압과 분신 정국이 이어지면서 강군의 영결식은 14일, 노제는 18일로 나뉘어 열렸다.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1991년 5월 강경대군의 장례 행렬이 서울 서대문구 신촌 로터리를 지나고 있다. 경찰의 진압과 분신 정국이 이어지면서 강군의 영결식은 14일, 노제는 18일로 나뉘어 열렸다. | 강경대열사추모사업회 제공

경향신문은 1991년 5월4일 이어지는 분신투쟁에 대한 기사를 냈습니다. 4월29일부터 5월3일까지 불과 5일 남짓한 기간 동안 총 3명의 대학생이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이고 캠퍼스에서 투신 자살이라는 방식의 투쟁을 택했습니다.

1991년 5월은 훗날 ‘분신정국’이라고도 불립니다. 전두환에 이어 ‘보통사람’을 표방하며 대통령에 오른 노태우 대통령은 3당 합당 등을 통해 여소야대 국면을 타개하고, 시민사회계와 대학가에서 불던 통일 논의 등을 공권력을 통해 무자비하게 진압했습니다. 5공 청산은 커녕 당시 ‘수서비리’라는 대규모 부동산 비리가 터지고 생활 물가가 치솟는 등 보통사람이 더 살기 어려워지고 있었습니다.

1991년이 ‘분신정국’이라고 불리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4월26일 강경대 열사의 사망이었습니다. 강 열사는 데모를 막기 위해 출동한 서울시경 기동대 소속 전경대원들에게 집단으로 구타당해 사망했습니다. 강 열사의 죽음 이후 대학가에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분신 자살이 이어졌습니다.

당시 전남대 2학년이었던 박승희씨(20·4월29일 분신)에 이어 안동대 2학년 김영균씨(20·5월1일 분신), 그리고 이날 기사엔 경원대 2학년 천세용씨(20·5월3일 분신) 소식이 실렸습니다. 이 후로도 김기설(26), 윤용하(22) 등 대학 캠퍼스에서의 분신 사건이 이어졌습니다. 5월22일까지 총 8명이 사망했고 사망한 8인은 모두 훗날 민주화운동관련자 인정을 받았습니다.

[오래전 ‘이날’] 5월4일 ‘캠퍼스에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

경원대학생인 천씨의 분신 소식을 알린 4일자 경향신문 기사의 제목은 ‘대학생 또 분신 절명’이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3일 오후 3시20분쯤 경기도 성남시 경원대 구내 창조관 3층 현관 난간 위에서 전자계산학과 2학년 천세용씨는 온몸에 신나를 뿌리고 몸에 불을 붙인 뒤 5m 아래 바닥으로 투신했습니다. 곧바로 동료들에 의해 한강성심병원, 연세대병원으로 2차례 옮겨졌지만 7시간 만인 이날 오후 10시20분쯤 숨졌다고 합니다.

천씨가 투신할 당시 불과 30m 떨어진 통일계단에선 오후 3시부터 학생 150여명이 모여 ‘살인폭력 노정권 퇴진 경원인 궐기대회’를 열고 있었습니다.

천씨의 투신을 목격한 공대 학생회장 황기용씨는 당시 상황에 대해 “집회를 시작하려는 순간 천씨가 몸에 신나를 뿌리고 난간 위에 서서 ‘학우여, 이제 복수다. 6천 경원인 단결투쟁, 노 정권 타도하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라이터를 꺼내 몸에 불을 붙인 뒤 비틀거리다 땅바닥으로 뛰어내렸다”고 전했습니다. 천씨가 땅에 떨어지자 동료들이 달려가 점퍼로 불을 끄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10여분 뒤 건물에서 소화기를 가져와 진화했지만 그때 이미 천씨는 의식불명 상태였습니다.

천씨가 떨어진 난간에는 대학노트 2장 분량의 유서가 남았습니다. 유서의 일부엔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많은 할 일이 남아있지만 내 몫까지 여러분이 투쟁해준다면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라고 동료에게 당부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천씨가 병원에서 숨지자 응급실 밖에 있던 경원대생 150여명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울먹여 응급실 주변이 한동안 울음바다를 이뤘다고 당시 기사는 전했습니다.

한편 이날 신문에는 연이은 분신 정국 관련 기사들이 다수 실렸습니다. 앞서 분신투쟁으로 숨진 안동대학생 고 김영균씨의 아버지 김원태씨(53) 인터뷰도 나왔는데요. 김씨는 인터뷰에서 “(투신한 대학생을) ‘열사’로 떠받들면 비극이 재발생할 우려가 있다”며 “내 아들 하나만으로 족하므로 더 이상 이같은 불행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학생들의 자제를 호소했습니다.

-관련기사: [강경대 사망 20주기]등록금 투쟁서 비롯, 정권 퇴진 운동으로 달궈져

이런 대학가 분신 투쟁의 분위기가 잦아들기 시작한 것은 시민사회계에서 준엄한 경고가 나오면서였습니다. 당시 5월5일자 조선일보에 김지하 시인은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라는 제하의 유명한 칼럼을 기고합니다. 해당 칼럼으로 인해 김 시인은 작가회의 제명 투표에 부쳐지기도 하지만, 이후 격론 속에서도 대학생들의 분신 투쟁 열기는 조금씩 잦아들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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