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부터 2011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1년 5월7일 언제까지 ‘폭력 집회’로 불려야 하나
30년 전 경향신문에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이른바 ‘집시법’ 개정 논의를 다룬 기사가 실렸습니다. 노태우 정부는 1991년 5월7일 평화적인 시위 문화를 정착시키기 위해 집시법을 개정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명지대 경제학과 1학년 강경대씨(당시 19세)의 죽음이 계기였습니다. 그 해 명지대는 일방적으로 등록금을 올리고 학생들에게 통보했습니다. 학생들은 총장실을 점거하고, 민주적 등록금 책정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같은 해 4월24일에는 방광철 당시 명지대 총학생회장이 상명여대(현 상명대) 연대 연설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연행됐는데요. 명지대생들은 서울 서부경찰서 형사과장을 납치해 총학생회장과 맞바꿀 것을 요구했습니다. 강씨는 시위에 나섰다가 경찰이 휘두르는 쇠파이프에 맞아 숨졌습니다.
사건의 여파는 컸습니다. 강경 진압의 상징이던 ‘백골단’의 해체가 시작됐습니다. 당시 여권·경찰 수뇌부 일각은 “날로 격화되는 시위 양상에 비춰볼 때 사복 체포 조의 해체 등은 있을 수 없다”며 백골단 해체를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시위가 전국에 번지며 걷잡을 수 없어지자, 이상연 당시 내무장관이 백골단을 무술 경관으로 대체하고 체포 기동대를 신설해 정복을 착용한 채 폭력 과격 시위에만 투입시킨다는 개선안을 내놨습니다.
이와 함께 집시법 개정 논의도 이뤄졌습니다. 1991년에는 1989년 3월 개정된 집시법을 따랐는데요. 해당 법 제5조는 ‘집회 및 시위의 금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크게 두 가지 성격의 집회·시위가 금지 대상입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해산된 정당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집회 또는 시위일 경우, 집단적인 폭행·협박·손괴·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직접적인 위협을 가할 것이 명백한 집회 또는 시위일 경우입니다.
두 조항 중 문제가 됐던 것은 후자였습니다. ‘집단적인 폭행·협박·손괴·방화 등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위협’을 가하는지 여부가 경찰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따라 정해졌기 때문입니다.
정부는 “경찰 당국의 자의적인 판단에만 집회·시위 허가를 맡길 게 아니라 허용 기준을 법으로 정해 공권력이 막거나 보호해야 할 집회·시위를 가려내 대처한다”는 개정 방향을 발표했습니다. 당시 내무부는 ‘교통소통에 지장이 되는 시위, 시민을 자극할 수 있는 집회, 화염병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는 시위 등은 허용하지 않는다’는 식으로 금지 기준을 명문화하겠다고 했습니다. 경찰관의 자의적 판단과 적용을 배제하기 위해 경찰서 안에 ‘집회·시위 허가위원회’를 별도로 설치하겠다고도 했습니다.
재야 단체와 학생들은 정부의 개정 방향을 비판했습니다. “재야 및 학생들의 집회는 무조건 금지하지 않았냐”며 법 조문이 잘못됐다기보다 법을 해석해 적용하는 당국이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실제로 노태우 전 대통령은 그 해 5월29일 “한 대학생의 죽음을 볼모로 한 일련의 시위를 통해 국민들은 폭력으로 사회를 전복하려는 극렬 세력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며 “정권 획득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야당의 기회주의적인 태도에 크게 환멸을 느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같은 달 30일 노태우 정부는 법을 개정하는 대신 ‘집회 및 시위문화 개선안’을 냈습니다. 개선안에는 ‘서울 등 대도시에 평화적 집회·시위 구역을 설치하고 운영한다’는 내용이 담겼습니다. 극심한 교통 혼란과 시민 생활의 불편이 예견되지 않는 운동장, 공원, 고수부지 등을 평화 집회·시위 구역으로 정해 최대한 집회·시위를 허용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재야 단체와 학생들은 “현행 집시법 내용과 실질적으로 다른 점이 없다”며 반발했습니다. 한상열 당시 범국민대책회의 상임대표는 그 달 31일 연합뉴스에 “시위는 자신의 주장을 국민에게 널리 알리기 위한 것인데 장소를 선전효과가 없는 변두리의 공설운동장 또는 고수부지 등으로 한정하는 것은 사실상 집회 및 시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당국이 진정으로 평화시위 문화를 정착하려는 의지를 갖고 있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30년 전 개정 논의가 일었던 집시법 제5조는 지금도 그대롭니다.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거리에 나선 이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또한 바뀌지 않았습니다. 2015년 11월14일 경찰이 쏜 살수차 물대포에 맞아 농민 백남기씨가 사망했죠. 2017년 경찰개혁위원회는 살수차 사용을 제한하는 권고안을 내고 경찰의 물대포 사용을 사실상 금지했습니다. 하지만 그 해 시흥캠퍼스 조성에 반대하던 서울대 학생들에게 교직원들이 소화전 물을 뿌렸습니다. 지난해에는 구 노량진 수산시장 용역이 상인들에게 호스로 물을 직사했습니다.
집회·시위를 정당한 권리로 인식하지 않으면 이같은 상황은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제2, 제3의 강경대를 낳지 않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