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이 1년의 개발 과정을 거쳐 창작 연극 여섯 편을 잇따라 선보인다. 지난해부터 작품개발사업 ‘창작 공감’을 통해 6명의 극작가·연출가와 협업한 결과다. ‘장애와 예술’을 주제로 한 연출가 강보름·김미란·이진엽의 작품과 동시대 담론을 화두로 삼은 극작가 김도영·배해률·신해연의 희곡이 두 달간 차례로 서울 서계동 국립극단 무대에 오른다. 연출가 김미란의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 극작가 신해연의 <밤의 사막 너머>(동이향 연출)가 오는 20일까지 먼저 관객과 만난다.
■두 개의 언어, 두 개의 세계
국립극단 소극장 판에서 공연 중인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원래 제목은 인투디언노운(미지의 세계로, 엘사 아님)>은 그 제목처럼 독특한 연극이다. 무대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두 명의 배우가 오른다. 박지영은 한국수어가 제1언어인 농인이고, 이원준은 한국어를 제1언어로 사용하는 청인이다. 다른 언어만큼이나 다른 세계를 갖고 있는 두 사람에게 과제가 주어진다. 박지영 자신의 이야기로 연극을 함께 만들라는 것. 둘은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만들 수 있을까.
배우들이 배역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무대에 서는 ‘다큐멘터리 연극’이다. 공연은 지영의 유쾌한 자기 소개로 시작된다. 농인예술단체 핸드스피크 소속 배우인 그는 어린 시절 미국의 친척 집에 놀러갔다가 TV에서 농인 배우가 나오는 것을 처음 봤다고 한다. 농인도 배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10대 시절부터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해왔지만, 예술대학 진학엔 실패한다. 그 경험을 소개하며 지영은 말한다. “이것은 어쩌면 실패담”. 그러나 그게 이야기의 전부는 아니다. 이 공연의 원래 제목, ‘미지의 세계로’ 가는 길이 남아 있다.
공연은 서로에게 이방인 같은 존재인 두 배우가 만나 서로의 세계로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상대방을 알아가기 위한 어색한 질문부터 밸런스 게임, 움직임 워크숍, 셰익스피어 희곡 <햄릿>과 <로미오와 줄리엣>의 한 장면 맞춰보기까지. 공연은 두 배우가 함께 무대를 만들기 위해 소통 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을 유쾌하고 재치 있게 보여준다.
수어통역사도 무대 한쪽에 함께 서지만, 일부 장면은 통역 없이 수어로만 진행된다. 관객들이 청인의 세계를 우회하지 않고 ‘지영의 세계’로 곧장 들어가게 하기 위해 의도된 연출이다. 같은 장면에서 농인 관객은 웃음을 터뜨리는 반면, 수어를 모르는 청인 관객은 분위기로 어렴풋이 내용을 짐작해야 했다. 청인 중심의 사회 시스템에서 농인이 일상적으로 겪는 소통의 벽을 청인 관객이 느끼고, 자신의 세계를 상대화할 수 있게 되는 경험이다. 연극은 지영과 원준, 두 세계의 만남에서 극장 밖 현실처럼 농인의 일방적인 양보나 노력만으로 소통이 이뤄지는 것을 경계한다. 김미란 연출은 “지영의 세계로 들어감에 있어 통역과 자막의 존재만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면서 “(관객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지영의 세계에 들어갈 방식을 찾기를 바란다”고 했다.
청인만을 위한 연극도, 그렇다고 농인만을 위한 연극도 아니다. 두 다른 세계와 언어가 만나 소통하는 과정에 관객이 동행하는 연극이다. 그 과정은 제목처럼 어쩌면 실패일 수도, 때로 성공일 수도 있다. 긴 공연 제목에 붙은 ‘엘사 아님’이란 부제가 말하는 것처럼, 다른 두 개의 세계가 접속하는 과정은 현실에서 그리 낭만적이거나 동화적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 세계가 좌충우돌 만나는 과정이 극장이란 공간 안에서 얼마든지 풍요롭고 흥미로운 예술적 경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 연극은 증명하고 있다.
■우울과 동행하는 긴 밤의 판타지
“나는 걸어요. 아주 오래, 꽤 오래. 무덤 같은 내 작은 방으로부터.”
작고 오래된 텔레비전 한 대만 놓인 적막한 무대. 여자의 방이다. 막이 오르면 여자가 걷는다. 공연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는 여자는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다가 “꽤 오래된 슬픔”을 알아차린다. “생각이 났어요. 나는 슬프구나. 어쩌면 꽤 오랫동안, 내내, 슬펐구나.”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 중인 <밤의 사막 너머>는 옛 친구를 찾아 꿈의 세계로 먼 길을 떠나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여자의 작은 방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꿈의 세계로, 밤의 사막으로 확장된다. 여자는 우연히 건네받은 부고 편지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옛 여자친구 ‘보리’의 흔적을 찾아 무심한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다. 그 길 위에서 원숭이탈을 쓴 아르바이트생, 전광판에 갇혀버린 바둑 기사, 다단계 회사의 리더, 고양이를 만나 사는 것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마침내 닿게 된 밤의 사막, 거기서 만난 것은 오랜 벗 ‘우울’이다. “그래, 나야, 우울.” “그래, 너였어. 우울.”
‘우울’과 동행하는 어느 긴 밤의 이야기가 몽환적인 분위기로 펼쳐지는 연극이다. 여자는 보리를 찾는데 성공하지도, 보리와 얽힌 과거의 극적인 사건이 드러나지도 않는다. 연극은 그보다 친구를 찾는 여정에서 마주하게 된 인물들의 감정을 더 공들여 보여준다.
판타지 속에서 도드라지는 것은 각 인물이 주고받는, 현실을 찌르는 대사들이다. 어디서도 집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은, 거리에 내던져진 기분에 “가난한 손가락을 걸고” 서로 집이 되어주기로 약속한 ‘고대의 부모’들, “아무것도 바뀌지 않으니까 결국 바꿀 수 있는 건 기분뿐”이라고 끝없이 자기 암시를 하는 다단계 회사의 리더, 타인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아직 내가 되기도 전에 벌써 내가 있는 삶”을 살았다고 말하는 바둑 기사의 이야기가 차례로 등장하고 사라진다.
현대인의 고립과 우울, 불안의 정경을 유머러스하면서도 세련된 방식으로 풀어낸 작품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해 기웃거리고 미끄러지는 삶의 감각들이 몽환적 영상과 함께 구현된다. 여러 대의 카메라와 스마트폰, 스크린 등 영상 장치를 통해 ‘디지털에 갇힌 삶’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했다.
“우울은 어디부터 시작됐고, 어디를 향할까”라는 질문에서 이 작품 집필을 시작했다는 신해연 작가는 우울에 대한 흔한 클리셰를 넘어 우울을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일종의 가능성으로 제시한다. 공연 말미 마침내 당도한 사막에서, 여자는 오랜 동행자 우울과도 헤어져 완전히 혼자가 된다. “너는 그 사막에서 다시 태어나기를.” 관객 각자가 자신의 ‘사막 너머’ 풍경을 그려보게 되는 연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