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1년째…돈으로 보상할 수 없는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들의 삶

2022.04.06 17:21 입력 2022.04.07 13:42 수정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빌딩 앞에서 피해자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가습기살균제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을 반대한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빌딩 앞에서 피해자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가습기살균제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을 반대한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가습기살균제 참사 후 11년 만에 나온 피해 구제 조정안이 사실상 무산되면서 피해자들과 유족들이 6일 기자회견을 열고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옥시레킷베니저와 애경산업을 규탄했다.

환경보건시민센터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및 유족들은 이날 서울 종로구 교보빌딩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소비자를 죽고 다치게 한 제품을 판매한 것도 모자라 10년간 책임을 회피하고 피해자들을 괴롭힌 옥시와 애경은 또다시 무책임한 살인기업의 면모를 내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가습기살균제 판매량과 피해자 발생 1·2위인 옥시와 애경의 반대에 사실상 조정안이 무산됐다”며 “사실 이들이 책임져야 할 피해자들은 조정 대상 7027명만이 아니라 건강 피해자로 추산되는 95만명인데, 전체 피해자 중 0.8%에 대한 피해조차도 책임지지 않겠다며 사회적 합의기구의 조정안을 거부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앞서 지난해 10월 출범한 가습기살균제 피해보상을 위한 조정위원회(위원장 김이수 전 헌법재판관)는 피해자 유족에 2억~4억원, 최중증(초고도) 피해자들에게 연령에 따라 최대 5억여원을 지급하라는 최종 조정안을 마련해 지난달 28일 피해자단체와 기업에 보냈다. SK케미칼·SK이노베이션·LG생활건강·이마트·홈플러스 등 9개 기업이 이를 위해 마련해야 하는 재원은 최대 9240억원 수준으로, 가습기살균제 판매율이 가장 높은 옥시는 절반 이상을, 애경도 수백억원을 부담할 것으로 추정됐다. 옥시 측은 이미 피해자와 유족에게 보상을 지급했다는 입장이다.

이에 대해 최예용 환경보건시민센터 소장은 “옥시가 폐 손상 1·2단계에 대해 배상해왔다고 주장하지만 그동안 배상한 피해자는 405명에 불과하다”며 “3000명 넘는 피해자가 옥시 제품을 사용했는데 나머지에 대해서는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조정위 활동은 계속돼야 한다는 입장이다. 유족 김태종씨는 “조정위는 계속돼야 한다고 피해자 전체가 이구동성으로 건의했다”며 “김이수 위원장을 비롯한 조정위 사무국이 다시 한 번 피해자 의견을 수렴하고 가해 기업을 설득해달라”고 말했다. 피해자들은 다음주 SK케미칼·옥시 경영진 등과 만나 조정위 연장 문제를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이들은 옥시와 애경이 끝내 피해 조정에 나서지 않는다면 정부와 국회가 나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기업이 조정에 나서지 않는다면 조정안의 피해지원 내용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법에 담도록 법을 개정하고, 기업들이 구제 기금을 내도록 강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옥시·애경 반대하면 조정안은 무의미…“적반하장”

가습기살균제 피해자 수는 7000여명으로 그 수가 매우 많고, 피해자 단체 수도 30곳에 달한다. 2011년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뒤 10년 이상 진상규명과 피해구제가 미뤄지면서 그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피해자마다 처한 상황이 다양하다보니 이번 조정안에 대한 입장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조정안에 대해 피해자 단체들도 절반은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피해자들이 모두 수용했더라도, 돈을 내야 하는 기업이 반대할 경우 애초 조정안을 성립될 수 없었다. 박수진씨는 “우리가 단합이 됐든 안 됐든 간에 기업이 철저히 자기 입장을 고수하다보니 합의가 안 된 것”이라며 “적반하장”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2003년부터 2년 간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다. 셋째 아이가 생후 8개월쯤 됐을 무렵이었다. 어느날 첫째(당시 6세), 둘째(당시 3세) 아이 모두 기침을 하고, 코가 막히고, 목에 가래가 끼기 시작했다. 폐렴으로도 이어졌다. “밤에도 애들이 숨을 잘 쉬나 확인해야 됐어요. 숨소리가 거칠다 싶으면 벌떡벌떡 일어나는거예요. 그렇게 응급실가고 외래가는 게 반복된거죠.” 박씨 셋째 자녀의 의료기록을 보면 1살이었던 2004년에만 37회 병원을 찾은 것으로 나온다. 이마저도 중환자실에 입원했던 내역은 뺀 기록이다. 둘째 자녀는 천식과 아토피 등을 진단받았고, 학창시절 내내 뛰는 운동을 하지 못했다. “학년이 바뀔 때마다 담임, 체육, 보건선생님들을 찾아가 상비약을 맡기고, 햇빛에 노출되거나 뛰어야 하는 운동에서는 제외해 달라고 부탁했어요.” 첫째는 군 제대 후 천식 진단을 받았다. 박씨의 둘째, 셋째 자녀는 ‘등급 외’ 피해 판정을 받았다. 박씨 본인과 첫째는 ‘단순 노출자’로 분류돼 피해등급 판정을 기다리는 중이다.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빌딩 앞에서 피해자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가습기살균제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을 반대한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가습기살균제 피해자와 유족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들이 6일 서울 종로구 광화문교보빌딩 앞에서 피해자들의 피해보상을 위해 가습기살균제 조정위원회가 내놓은 최종 조정안을 반대한 가습기살균제 제조업체 옥시레킷벤키저와 애경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권도현 기자

■기업이 반대할 만큼 조정안은 과도했나

무산된 조정안은 가장 높은 피해등급인 ‘초고도’ 피해자의 경우 최소 8392만(84세 이상)~최대 5억3522만원(1세)을 받고, 사망자 유족들은 최소 2억(60세 이상)~4억(0~19세)원을 받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현재까지 피해구제를 신청한 이들의 수는 7696명으로, 이 중 피해등급(초고도·고도·중증도·경도·경미한·등급 외)을 받아 가습기살균제 피해구제를 위한 특별법(이하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른 정부 지원금을 수급 받았거나 받고 있는 이들은 710명이다. 이 중 조정안에 담긴 초고도 피해자는 10명에 불과하다. 고도는 68명, 중증도는 90명, 경도는 122명, 경미한은 11명, 등급 외는 409명이다. 대다수가 ‘등급 외’에 해당한다.

더구나 조정안의 피해보상 연령은 ‘1세’부터 시작했다. 피해보상금은 연령이 낮을수록 높아진다. 박씨 자녀들 같은 ‘등급 외’의 경우 1세는 8650만원을 받지만, 84세 이상은 2500만원을 받도록 돼 있다. 하지만 조정 대상자 중 1~10세 피해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습기살균제 피해는 2011년 세상에 알려졌다. 2011년에 태어난 가습기살균제 피해 아동도 현재 11세다. 박씨를 비롯한 많은 피해자들은 조정안에 지속적인 치료가 필요한 이들을 위한 ‘미래 치료권’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내용이 포함돼야 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그런 내용은 담기지 못한 채 조정안은 무산됐다.

■쌓이는 병원·간병비

피해자들 중 일부는 가습기살균제피해구제법에 따라 간병비와 요양급여 등을 지원받았다. 하지만 실제 투병 과정에서 들어간 비용을 온전히 보상받은 이들은 거의 없다. 김태종씨는 2020년 8월 부인 박영숙씨를 가습기살균제 피해로 잃었다. 박씨는 2014년 정부의 1차 가습기살균제 피해판정에서 ‘가능성 낮음’에 해당하는 3단계 판정을 받았다. “어려서 결핵을 앓았었는데, 기저질환이 있다고 3단계가 나왔어요.” 당시의 피해판정 기준은 이후에도 계속 논란이 됐다. 김씨는 원래 부인과 함께 학원을 운영하며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해 납품하는 일을 했지만 오랜 투병생활로 빚이 쌓여 2010년부터는 화물차 운전을 하고 있다. 피해구제 신청을 해 병원비와 간병비 등을 지원받았지만 ‘쓴 것 만큼’ 받지는 못했다. “병원비도 50~60%밖에 지원 못 받았어요. 병원도 큰 병원 아니면 자료를 10년 이상 갖고 있는 곳은 많지 않아요. 지금은 약국도 5년치 자료 밖에 없어요. 내가 꼼꼼한 사람인데도 그 정도 받았습니다.” 김씨가 말했다. “전일제 간병을 하면 월 280만원 정도를 달라고 해요. 하루는 간병인도 쉬니까 대체하려면 그날은 다른 간병인을 쓰는데 또 돈 들어가죠. 숙식제공 하면 330만원 정도 나와요. 저희는 간병비로 3년 간 150여만원 받았어요. 말도 안되는거죠.”

안희주씨는 동생 은주씨가 가습기살균제 피해자다. 은주씨 역시 2014년 판정 때 3단계를 받았다. 2019년 11월 두 번째 폐이식 수술을 받고 병원에서 투병 중이다. 희주씨는 2019년부터 동생 간병을 하고 있다. 그가 사는 곳은 경남 함안, 동생이 입원해 있는 곳은 서울이다. “간병비는 24시간 기준 한달 계약으로 하면 380만~420만원 정도 들어갔어요. 전부 빚이죠. 동생 집, 모친 보험금까지 담보 잡아 대출했어요.”

박수진씨 셋째 아이의 천식 요양급여 1차 지급 내역서를 보면, 박씨가 병원에서 실제 지출한 금액은 2003~2016년 총 2498만원이지만, 실제 지급된 지원금은 224만원이다. 신청했지만 지급되지 않은 사유는 ‘천식 관련 질환의 검진 및 치료와 무관’하다고 적혀있다. “아이들은 연약해서 천식약을 복용하다보면 여러 부작용이 생겨요. 천식 때문에 다른 질병이 발생하니까 애가 밥을 못 먹고, 그럼 또 다른 약을 추가로 짓게 되는데 그건 빠진거예요. 이 비용도 상급병실, 비급여 비용은 제외된 겁니다.”

가습기 살균제 합의를 위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앞에서 윤석열 당선인 면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박민규 선임기자

가습기 살균제 합의를 위한 피해자 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31일 서울 통의동 대통령직 인수위앞에서 윤석열 당선인 면담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박민규 선임기자

■피해자들 “이대로 조정위 해체는 안 돼”

피해자들은 현 조정안은 무산됐지만 조정위가 이대로 활동을 끝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A씨는 “이대로 끝나면 기업은 그냥 기업 활동을 할 것이고, 조정위원들은 자기 직장으로 돌아가 일을 하겠지만 피해자들은 어떻게 하느냐, 기한을 연장해서라도 조정을 해달라”며 “너무 자존심이 상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했다. 박수진씨도 “조정위를 11년 만에 힘들게 세웠는데, 이게 깨지면 더 이상 세울 수 있는 뭔가가 없다. 그래서 이건 끌고 가야 하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합의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정위는 오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진행 상황을 중간보고 형식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다만 활동 기간 연장은 피해자 측과 기업 의사에 따른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안식 조정위 사무국장은 “조정위가 임의로 연장 결정을 할 수 없고, 추가로 연장해 활동하려면 양측의 합의가 있어야 한다”며 “그때까지는 부동의 기업과 협의를 추가로 시도하겠다”고 말했다. 가습기살균제 합의를 위한 피해자 단체(가피단)는 오는 13일 SK케미칼과 옥시 경영진을 만날 계획이다. 송기진 가피단 대표는 “피해자에게 개별 소송을 통해 구제 받으라는 식으로 가면 배보상 문제는 해결이 요원하다”며 “조정위의 활동 연장을 놓고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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