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분장실 안 아버지와 아들, 두 배우 이야기···1인극 무대 선 배우 김진근

2022.07.27 11:13 입력 2022.07.28 07:44 수정

여름체홉축전 개막작 ‘어 테일 오브 그린룸’

배우 김진근 작·연출·연기한 모노드라마

유명배우였던 부친 김진규에 대한 기억…분장실 안 부자의 이야기

‘그린룸(Green room)’은 극장의 분장실을 지칭하는 단어다. 배우가 무대에 서기 전 마지막 준비를 하는 곳이자 공연을 마치고 세상 밖으로 나갈 채비를 하는 곳이다. ‘그린룸’이란 단어는 심리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으로 알려진 옅은 초록색으로 벽이 칠해져 있는 데서 유래했다.

지난 20일 서울 종로구 안똔체홉극장에서 막을 올린 1인극 <어 테일 오브 그린 룸(A Tale of Greenroom)>은 이 ‘그린룸’ 안 아버지와 아들, 두 배우의 이야기다. 배우 김진근이 쓰고 연출했고, 공연의 유일한 배우로 무대에 선다.

안똔체홉학회가 주최하는 올해 ‘여름체홉축전’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어 테일 오브 그린 룸(A Tale of Greenroom)>은 분장실 안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1인극이다.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안똔체홉학회가 주최하는 올해 ‘여름체홉축전’ 개막작으로 무대에 오른 <어 테일 오브 그린 룸(A Tale of Greenroom)>은 분장실 안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담은 1인극이다.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연극이 시작되면, 멀리서 공연장의 박수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광대 분장을 한 남자가 인형과 함께 등장한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남자는 분장을 지우기 시작하고, 방금 전까지 자신과 함께 공연했던 인형의 얼굴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린다.

연극은 김진근의 자전적인 이야기다. 1960년대 은막의 스타이자 <오발탄>(1961) <벙어리 삼룡이>(1961)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4) 등 600여편의 영화 주인공을 맡으며 한국 영화사에 족적을 남긴 배우 김진규(1923~1998)가 그의 부친이다. 유명 배우였던 아버지와의 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올린 배우 김진근을 지난 22일 공연이 끝난 뒤 만났다.

-극작은 물론 연출과 연기까지 혼자한다. 주로 배우로 활동해 왔는데, 작품을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연출 경험은 몇 번 있지만 극작은 처음이다. 원래는 내 멘토이자 스승인 김성구 선생님의 마임 인생 50주년을 축하하기 위해 준비하던 공연이었다. 기주봉, 최규호, 박성일, 이동우, 그리고 나까지 배우 5명이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만들어 옴니버스 스타일의 작품을 헌정하려 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프로젝트가 잠정 중단됐고, 이후 2년반 정도 내 이야기를 준비하는 시간을 기졌다. 부끄러워도 가장 솔직한, 내 이야기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지난해에 황미숙 연출과 경기아트센터에서 <테레비-죤>이라는 공연을 같이 했는데, 거기서 15분 분량의 독백으로 이 이야기를 처음 올렸다. 이후 대본을 대폭 수정해 이번에 1시간10분 분량의 공연을 하게 됐다.”

배우 김진근.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배우 김진근.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인형을 아버지 삼아 연기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글을 쓰던 중 우연히 북유럽의 한 인형극 영상을 봤는데 거기서 영감을 얻었다. 제작은 이 작품의 프로듀서이기도 한 박성일씨가 운영하는 회사에 맡겼다. 거기서 퍼펫 만드는 장인이 ‘나는 형태만 만들어 드릴 테니, 거기에 디테일을 입히는 작업은 김진근씨가 직접 하라’고 했다. 그래야 배우의 숨이 인형에 닿고 공연에서 조금이나마 감정이 오갈거라고, 완성도가 떨어지더라도 내 손에서 살아나지 않으면 그건 죽은 인형이라고 하더라. 그렇게 만든 인형이니 의미가 더 각별하다.”

유명배우였던 아버지…부자의 화해·치유의 이야기

“아버지를 닮은” 인형은 공연 초반 오브제처럼 무대 한 켠에 놓였다가 배우의 독백을 듣는 말 없는 청자가 되기도, 그 자체로 아들을 어루만지는 아버지가 되기도 한다. 배우는 아버지를 향해 아들로서, 또 배우로서 그간 하지 못했던 지난 삶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부모의 이혼으로 일곱살 이후 스크린에서나 만날 수 있었던 아버지의 존재, 27년 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의 공연을 보러 왔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 생의 끝자락에서 다시 재회한 아버지에 대한 감정을 담담하게 밝힌다.

-유명 배우였던 아버지 이야기를 공연에 담았다.

“알코올 중독자 치유 모임에 가면 자신이 알코올 중독인 걸 인정하는 것부터 시킨다고 한다. 나도 인정부터 해야 배우로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내 안의 부끄러움 같은 걸 말이다. 일곱살 때 헤어진 후 아버지에 대해 잘 아는 것도 없었지만, 아버지가 배우로서 걸어온 그 멋진 길에 내가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으로만 살아왔다. 그게 할 수 있는 최선이었고, 내 안의 응어리들은 신경쓰지 못했다. 50대가 된 지금에 와서 내 안의 코어, 뿌리와도 같은 아버지란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됐다. 끄집어내기 두려웠던 과거와 감정들을 이번 공연으로 꺼내놓고 보니 그렇게 두려운 게 아니더라. 내 안의 문제를 직시하고, 빙빙 돌리지 않고 내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고 생각했다.”

연극 <어 테일 오브 그린룸(A Tale of Greenroom)>의 한 장면.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연극 <어 테일 오브 그린룸(A Tale of Greenroom)>의 한 장면.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아버지 김진규, 어머니 김보애, 누나 김진아 등 가족이 모두 유명 배우였던 김진근은 자연스럽게 연기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미국 뉴욕에서 연기를 공부하다가 부친의 투병 소식을 듣고 귀국해 오랫 동안 교류가 없었던 아버지와 재회했다. 그는 “돌아가실 때까지 2년이 어렸을 때 이후 아버지와 함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는데, 마음 속 깊은 얘기는 터놓고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연극은 배우가 ‘그린룸’에서 세상 밖으로 향하기 전, 아버지에게 못다한 고백과 부자의 화해, 용서의 순간들을 그린다. 녹초가 된 모습으로 분장실에 들어섰던 배우는 한층 홀가분한 표정으로 그곳을 떠난다.

“무대 위에서 울컥할 때도 있지만, 울지 않으려고 한다. 신파적으로 이 연극을 풀고 싶지 않았다. 예전엔 동의하지 못했지만 눈물은 배우의 몫이 아니라 관객의 몫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젠 알 것 같다. 한 개인의 한풀이가 아니라, 분장실에서 세상 밖으로 향하는 모든 배우들의 이야기를 담은 연극이다. 그래서 제목을 ‘더(the) 테일 오브 그린룸’이 아니라 ‘어(a) 테일 오브 그린룸’이라고 붙였다. 연극은 배우에게 매일 새로운 여정이고, 계속 진화할 수 있다는 게 연극의 매력인 것 같다. 계속 발전시켜 언젠가는 이 작품으로 오픈런 공연을 할 계획이다.”

공연은 31일까지 열린다.

연극 <A Tale of Greenroom>의 한 장면.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연극 <A Tale of Greenroom>의 한 장면. 바나나프로덕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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