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남겨진 공범들(3)

돈 되니 눈감고, 수사엔 비협조···플랫폼이 ‘최후의 공범’

2022.09.25 15:40 입력 2022.09.25 22:58 수정

-n번방 전에 ‘웹하드 카르텔’, 이제는 텔레그램·디스코드

-해외 메신저 플랫폼 중심 확산···‘사적 대화’ 법망 벗어나

-현재는 ‘접속 차단’이 최선, 국가 차원 제재·경고 필요성

다큐멘터리 <오픈 셔터스>의 한 장면. 필드오브비전·타임 제공

다큐멘터리 <오픈 셔터스>의 한 장면. 필드오브비전·타임 제공

“(아이디만) 변경하면 계속 판매 활동할 수 있다는 내용의 말을 들었던 것은 맞습니까?”(검사) “그거는 맞는 것 같습니다.”(증인) “그건 확실히 맞습니까?”(검사) “네.”(증인)

지난 3월14일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제3호 법정. 일명 ‘웹하드 카르텔’ 사건 1심 공판이 진행 중이었다. 피고인은 양진호 전 한국미래기술 회장. 증인은 양 전 회장이 운영한 웹하드 업체 ‘위디스크’에 각종 음란물을 유포해온 ‘헤비 업로더’였다. 그는 ‘위디스크 직원이 전화해 외부업체(방송통신위원회)의 압박이 있으니 아이디를 변경해 판매 활동을 이어가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고 2018년 경찰과 검찰 조사에서 진술했다.

25일 경향신문이 입수한 양 전 회장 공판기록에 따르면 검사는 이 진술에 대해 집중적으로 신문했다. 증인은 양씨 측 변호인의 신문 때도 ‘위디스크가 음란물 유통을 방치했다’는 취지로 증언했다. “계속 그런 판매를 업로드할 수 있게 해줬으니까 그게 호의적인 것 아닌지….”

웹하드 카르텔은 음란물 불법유통 수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헤비 업로더, 웹하드 업체, 필터링 업체, 디지털 삭제 업체가 담합한 웹하드 사이트 운영 형태를 말한다. 2018년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활동가들이 공론화했다. 검찰은 당시 ‘갑질 폭행’으로 재판에 넘겨진 양 전 회장에게 ‘음란물 유포 및 방조’ 혐의를 추가했다. 양 전 회장이 웹하드 카르텔을 통해 벌어들인 수익은 70억여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웹하드 카르텔에 대한 1심 선고는 지난 8일 예정됐으나 양 전 회장 측 변호인이 선고를 이틀 앞두고 변론 재개 요청서를 제출해 미뤄졌다.

n번방 사건이 발생한 직후 여성들은 “n번방 이전에 웹하드 카르텔이 있었다”고 외쳤다. 앞서 웹하드가 성착취물 등 불법 동영상을 통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으니 n번방은 하루아침에 등장한 범죄가 아니라는 구호였다. 유통경로가 다변화했을 뿐 ‘성착취물을 통해 수익을 거둔다’는 본질은 같다는 취지이다. 과거에는 소라넷 등 해외 불법 사이트와 웹하드 등을 통해 불법촬영물·성착취물 등이 퍼져나갔다면 이제는 텔레그램, 디스코드 등 해외 메신저 플랫폼 등으로 유통경로가 확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2020년 3월 텔레그램 탈퇴 운동까지 벌이며 플랫폼을 압박했으나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다. 플랫폼은 디지털성범죄에서 아무런 책임이 없을까. 법망을 비켜선 이들의 실태를 살펴봤다.

수사기관 비웃는 텔레그램과 공범들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통 실태를 추적한 경향신문의 보도가 있던 지난 13일 오후 성착취물 유통 대화방에 ‘디스코드 운영이 너무 편해 디스코드로 운영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텔레그램 캡쳐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통 실태를 추적한 경향신문의 보도가 있던 지난 13일 오후 성착취물 유통 대화방에 ‘디스코드 운영이 너무 편해 디스코드로 운영한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텔레그램 캡쳐

“텔레그램은 협조 절대 안 하니까 괜찮다.” n번방 사건 당시 가담자들은 경찰의 수사 역량을 조롱하며 이같이 말했다. 자신감의 근거는 메신저 애플리케이션 ‘텔레그램’의 폐쇄성이었다. 텔레그램은 ‘검열받지 않을 자유’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2013년 출시됐다.

2020년 3월 꾸려진 서울중앙지검 ‘디지털성범죄 특별수사 태스크포스(TF)’는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음란물 제작·배포) 위반 및 방조 혐의를 적용해 텔레그램 법인을 수사했다. 하지만 텔레그램 측이 수사에 협조하지 않아 결국 처벌하지 못했다.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김영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텔레그램 자료제공 요청 내역’에 따르면, 경찰은 n번방 수사를 위해 2020년 2월부터 8월까지 총 7차례에 걸쳐 텔레그램에 수사 협조 메일을 보냈으나 한 차례도 답을 받지 못했다.

최근 불거진 ‘엘 성착취 사건’도 텔레그램의 비협조적 태도로 수사에 난항을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남구준 경찰청 국가수사본부장은 지난 5일 사건이 최초 접수된 경기 파주경찰서의 초동 대처 미흡을 언급하며 “텔레그램, 페이스북 등 관련 회사에 협조를 요청했는데 텔레그램은 한계가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텔레그램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와 경찰청의 성착취물 삭제 요청에도 묵묵부답이라고 한다.

지난해 12월 ‘n번방 방지법’이 시행됐으나 텔레그램은 법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는다. n번방 방지법은 인터넷 사업자가 불법 촬영물 등 성범죄 정보로 의심되는 게시물을 삭제하거나 게재를 제한하도록 의무를 부과한 법이다. 텔레그램이 법망을 비켜간 것은 메신저 대화가 ‘사적 대화’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n번방 사건이 발생한 텔레그램에는 정작 ‘n번방 방지법’을 적용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메신저 앱 ‘디스코드’ 역시 사적대화방으로 분류돼 법 적용을 피했다. 방통위 인터넷윤리팀 관계자는 “(텔레그램이) 해외사업자라서 적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적 대화방에 해당해 n번방 방지법이 적용되지 않는 것”이라며 “통신의 비밀과 자유 보장을 위해 사적 대화방은 들여다볼 수 없도록 했다”고 말했다.

플랫폼이 책임을 회피하는 사이 범죄자들은 서식지를 늘려가며 디지털성범죄를 이어가는 중이다. 텔레그램 성착취물 유통 실태를 추적한 경향신문의 보도가 있던 지난 13일 오후 5시55분 성착취물을 유통하는 대화방에 다음과 같은 공지가 떴다. ‘디스코드 운영이 너무 편해 디스코드로 운영합니다. 자료 많이 올려놨으니 보러오십시오.’ 대화방에 모여있던 1000여명의 수요자와 유통업자는 일주일 사이 디스코드로 완전히 터를 옮겼다.

사업자 처벌 공백 보여준 ‘손정우 사건’

플랫폼 사업자 음란물 방조 혐의 수사 및 처분 현황

플랫폼 사업자 음란물 방조 혐의 수사 및 처분 현황

n번방 사건 이후 디지털성폭력 관련 법이 개정됐으나 플랫폼 운영자에 대한 처벌 규정은 제외됐다. n번방 사건 주범들은 범죄단체조직죄를 적용해 엄하게 처벌했다. 사회적 이목이 쏠린 사건이라 가능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세계 최대 아동 성착취물 거래 사이트 ‘웰컴투비디오(W2V)’를 운영한 손정우씨는 아동 성착취물 유포 등의 혐의로 기소돼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았지만, 20만개에 이르는 성착취물이 유통된 플랫폼을 운영한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다. 손씨는 2015년부터 3년간 다크웹에서 W2V를 운영하면서 아동 성착취물 3055개를 4073명에게 7293회에 걸쳐 판매했다. 그가 유통한 성착취물엔 2~4세 영유아도 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법무부는 손씨의 출소에 맞춰 범죄인 인도 청구를 요청했으나 법원이 불허해 손씨는 미국 송환을 피했다. 미국에서 손씨가 재판을 받으면 최대 징역 60년까지 받을 수 있다.

손씨의 미국 송환을 불허한 서울고법 형사20부(부장판사 강영수)는 “범죄인이 청구국으로 인도된다면 범죄인의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대한민국에서는 W2V 국내 회원들에 대한 수사가 현 단계에서 미완의 상태로 마무리되거나 그 진행에 지장이 생길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불허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송환 불허로 얻은 수사 효과는 미미했다. 강훈식 민주당 의원실을 통해 입수한 경찰청 자료에 따르면 경찰이 국제공조수사 등을 통해 2018년 3월부터 2022년 3월까지 검거한 W2V 사건 관련 한국인은 총 277명이다. 이 중 재판부가 손씨의 미국 송환을 거절할 무렵인 2020년 7월6일까지 검거한 인원이 223명이다. 송환 불허 결정 이후 지난해 3월까지 약 2년이 넘는 기간에 경찰이 추가 검거한 W2V 한국 회원은 54명에 불과한 셈이다. W2V의 전체 유료 이용자 수는 3340여명으로 알려졌다.

W2V 사건 관련자 중 재판에 넘겨져 선고를 받은 이들은 플랫폼 운영자인 손씨를 포함해 40여명에 불과했다. 남인순 민주당 의원실이 입수한 1심 판결문 42건에 따르면 이들 중 징역형이 내려진 경우는 1건도 없었다. 벌금형이 34건으로 가장 많았고, 집행유예가 7건, 선고유예가 1건이었다.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손씨가 유일했으나 징역 1년6개월형에 그쳤다.

현재 손씨는 4억원 가량의 범죄수익을 은닉한 혐의로 다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그는 지난 7월 1심 재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손씨는 이 형량이 높다면서 같은 달 11일 항소했다.

“플랫폼, 성착취물 돈 된다 인식 버려야”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연합뉴스

모바일 메신저 ‘텔레그램’. 연합뉴스

현재로선 해외 플랫폼에 성착취물이 올라오면 국내 인터넷서비스업체(ISP)인 통신사를 통해 이용자의 접속을 차단하는 것이 최선이다. 전문가들은 해외 플랫폼을 간접 제재할 필요도 있다고 말한다. 아동청소년 성착취물이 해외 서버를 통해 유통되는 것을 국제공조로 막는 방안도 거론된다.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여겨지는 텔레그램도 당국의 압박에 무릎을 꿇은 사례가 있다. 지난 3월 브라질 대법원은 ‘당국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허위정보가 포함된 메시지도 삭제하지 않았다’며 구글과 애플 앱스토어 등에서 텔레그램 앱을 삭제하고, 자국 인터넷과 통신업체에 텔레그램 접속을 차단하라고 명령했다. 텔레그램은 하루 만에 대법원 측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대표가 직접 경찰에 협조하겠다는 방침을 밝히자 브라질 대법원은 이틀 만에 차단 명령을 철회했다. 텔레그램은 지난 6월 테러 및 아동학대 사건 용의자들과 관련한 독일 연방범죄수사청 측의 자료 요청에 응하기도 했다.

브라질과 독일 사례에서 보듯, 수사에 협조하지 않을 경우 국가가 나서서 플랫폼을 제재할 수 있다고 경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앱 마켓 사업자 등 ‘유통업자’에게 경고 문구 게시 의무를 부과하거나 앱 유통을 일시적으로 차단하는 방안 등이 거론된다.

시행 9개월째인 n번방 방지법의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성착취 피해 아동·청소년을 지원하는 십대여성인권센터 조진경 대표는 “n번방 방지법이 현장에서는 법 적용이 전혀 안 되고 있다”며 “입법만 해놓고 성착취 온상이 되는 플랫폼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하는 사이 SNS와 채팅사이트의 보안·안전성은 계속 높아졌다. 이 매체를 사용하는 가해자들이 더 안전한 환경에서 범행을 저지를 수 있게 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현숙 탁틴내일 대표는 “최근 일부 기업에서 온라인상에서 벌어지는 아동·청소년 대상 그루밍 범죄를 파악하는 즉시 보호자에게 신고 조치하는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고 들었다”며 “박사방·n번방 사건 등 굵직한 사건을 거치면서 작게나마 조금씩은 변화가 일고 있다고 느낀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기술적인 개선만이 아니라 플랫폼 사업자들 또한 ‘아동·청소년 음란물이 돈이 된다’는 인식을 버려야 한다”면서 “인식 개선을 시작으로 정부와 기업, 플랫폼 사용자들의 협업이 병행돼야 아동·청소년 성착취물 유통을 방지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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