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 밥그릇 걷어차기

2022.11.28 03:00

문화 정책에서 가장 빈번하게 인용되는 단어는 ‘팔길이 원칙’이다. 너무 멀리 하지 않고, 너무 가깝게 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지원은 하지만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그 반댓말은 ‘손바닥 원칙’이다. 문화를 자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자기 마음대로 하려고 할 때 이렇게 표현한다. 힘을 가지면 모든 것을 장악하고 싶어지는 게 힘의 속성이기는 하지만, 그건 힘의 속성일 뿐이다.

우석훈 경제학자

우석훈 경제학자

이명박 정권 초기에 촛불집회가 있었다. “이 돈이 다 어디서 나왔느냐”고 대통령이 질문을 하였고, 그때부터 정권 차원에서 ‘밥그릇 걷어차기’가 진행되었다. 문화 영역의 대부분의 생산자와 스태프들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고, 정부 문화정책에 연명하여 겨우겨우 버티는 경우가 많다. 그중에서 형식까지 갖추어서 진행된 것이 그 유명한 ‘블랙 리스트’ 사건이다. 그나마 유명한 사람들이 블랙 리스트 같은 데에도 올라가고 그런다. 협회나 이런 데에 별로 관련되어 있지 않고 인지도도 높지 않은 문화 창작인들은 블랙 리스트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냥 알아서 지원금을 끊었고, 이런 경우에는 어디서 하소연할 방법도 별로 없다.

지난 16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제43주년 부마민주항쟁 기념식에서 사건 하나가 터져나왔다. 작년에 한국대중음악상을 받은 가수 이랑의 ‘늑대가 나타났다’는 노래가 재단 부탁으로 예정된 공연이었다. 합창단과 함께 공연을 준비해온 이랑에게 시련이 나타난 것은 행정안전부의 조치 이후다.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검토해 달라는 의견을 재단에 전달한 바”는 있다고 하는데, 이게 검열은 아니라는 게 행안부 입장이다. 돈을 행안부에서 받아야 하는 부마항쟁기념재단의 입장이 곤란해졌을 것이다. 이 곡을 꼭 넣어달라고 이랑에게 부탁한 것은 재단이다. 누구 아이디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록수’ 정도로 곡을 바꿔달라는 요청이 가수에게 있었나보다. 아마 가수 개인의 일이라면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바꿀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공연 준비를 마친 상황에서 그것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결국 ‘늑대가 나타났다’는 공연되지 못했다. 그러면 돈은? 돈을 안 주겠다고 한 건 아닌데, 가수가 거절했다는 행정적 취지로 계약한 돈을 주니 안 주니, 조금만 주겠느니, 이런 실랑이가 진행 중인 것으로 보도되었다.

이 사건은 하나의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고, 유사한 행사 혹은 행안부가 연관된 많은 사업에 영향을 미친다. 전형적인 갑을관계인 원청이 원하는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피하지 않을 사업자는 별로 없다. 문화의 팔길이 원칙은 이미 훼손되었고, “내 눈에 좋은 것”을 하라는 손바닥 원칙이 윤석열 정부의 새로운 문화 원칙이 되어간다. 부마민주항쟁에서도 이랬는데, 그보다 대표성이 약하고 관심이 덜한 행사야 말할 게 뭐가 있겠는가?

진보 정부라고 문화 정책을 잘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분야별로 돈 줄을 쥔 몇몇 실력자가 줄세우기하고, 행정 자체를 쥐고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 광주에서도 보았고, 서울에서도 보았고, 연극에서도 보았고, 영화에서도 보았다. 그래도 이렇게 노골적인 ‘밥그릇 걷어차기’는 좀 숨어서 하려고 했던 것 같다.

윤석열 정부 6개월, 문화 분야에서 ‘밥그릇 걷어차기’가 점점 더 빈번해진다. 마포구청에서 전국적인 모범사례가 된 작은 도서관의 위탁 업체에 일방적으로 위탁 종료를 통보한 것은 밥그릇 걷어차기의 일종이다. 문화의 영역은 크고 넓다. 서울시 의회가 자신의 입맛대로 방송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TBS에 대한 지원을 끊는 것 역시 전형적인 ‘밥그릇 걷어차기’다. “돈 줄을 끊어버리면 자기들이 어쩔 것이냐”, 이런 좀 치사한 문화 정책이다. 대주주로 있던 YTN에서 한전 자회사가 철수하는 것 역시 이런 ‘밥그릇 걷어차기’의 일환 아니겠느냐? 심지어는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편과 같은 좀 더 큰 스케일의 공작 역시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흉흉하다.

보수들의 문화 정책과 관련해서 내가 가장 감명 깊게 들은 얘기는 프랑스 드골 대통령의 사례다. 실제 문화부라는 정부 부서를 만든 것 자체가 드골이 한 일이다. 식민지였던 알제리 독립에 대해서 장 폴 사르트르가 반대 의견을 냈는데, 완전 난리가 났다. “사르트르 죽인다.” 이런 반응이 한창이던 때, 드골이 했다는 얘기가 내 가슴 한구석을 후벼폈다. “그도 애국자다.” 노벨 문학상도 거부한 사르트르에게 ‘애국자’라는 말이 큰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 사건에 대해서 수수방관하지 않았던 드골을 보면서 ‘훌륭한 보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수 이랑에게 ‘밝고 희망찬 분위기의 선곡’을 부탁한 윤석열 정부는 팔길이 원칙을 내던진 검열 정부이다. 그리고 이번의 부마민주항쟁 사건은 ‘밥그릇 걷어차기’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겠다는 노골적인 선언 아닌가? 문화 정책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일본 자민당의 집권이 오래 가는 이유 중의 하나가 만화와 애니메이션 같은 데에서 ‘밥그릇 걷어차기’를 안 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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