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럴 줄 알았다. 지난 칼럼에서 내가 언론사의 수익모형이고 지불장벽이고 말하기 전에 이용자에 대한 자료분석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고 쓰면서 이런 반응이 나올 줄 알았다. 직접 듣기도 했고 전달받은 이야기 중에 그동안 언론도 할 만큼 해 봤는데 소용없더라는 말이 있다. 비판도 아니고 변명도 아닌 그 말에 살짝 위악감이 든다. 나야말로 ‘너희들 사장이랑, 어이, 밥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어이, 뭐 다 했어’라고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다.
자료기반 언론개혁론의 핵심은 주필의 예지적 판단력이나 보도국장의 방향감각을 이용자 자료분석으로 대체하자는 게 아니다. 지면 개혁이나 조직 개편으로 발생한다고 예상할 수 있는 이용자의 행동변화를 측정하고 분석할 수 있는 도구가 없다면 기자의 예지력과 감각을 적용할 대상마저도 없다는 게 요점이다. 해 봤는데 소용없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지 검토할 수 있도록 자료라도 건져야 한다. 자료가 없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심지어 잘못했다는 그 평가가 온당한지조차 알 수 없다.
언론인이라면 관찰해서 쓰는 게 일이기에 자료수집과 분석에 대해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현상을 관찰해서, 사실과 의견을 구분하고, 사실을 기반으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게 언론의 일이다. 그러나 현상에 대한 해석을 이야기로 포장해서 제공하는 일과 그 현상에 내재한 인과관계를 추론해서 설명하는 일은 서로 다르다. 전자는 복잡한 현상에 대한 이해를 돕는 일이고, 후자는 현실에서 발생한 변화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이다. 보통 기자와 제작자들은 후자의 중요성을 민감하게 느낄지언정 그것을 검토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도록 훈련받지 않는다.
예컨대, 왜 어떤 나라 사람들은 잘살고 다른 국가의 인민은 못사는지 물어보자.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도대체 ‘잘산다’는 게 뭔지 개념을 설정하고 세계 인민의 삶을 비교할 수 있는 측정 도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일단 설명으로 가는 길을 걷게 된다. 잘사는 나라와 그렇지 못한 나라의 성패를 유발하는 요인을 지목해서 그 요인이 작동하는 양상을 서술할 수 있다면 이른바 ‘설명모형’을 갖춘 격이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어렵다. 자신의 설명모형이 타당한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수집해서 검증에 나서야 하기 때문이다.
한 줄의 설명이라도 타당하다고 주장하려면 인과추론을 정당화하는 자료분석 결과를 제시해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린지 의아한 언론인들은 애스모글루와 로빈슨의 명저 <좁은 회랑>을 구해 읽어 보길 바란다. 먼저 국가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서 이 책이 제시한 내용보다 얼마나 더 재밌게 쓸 수 있을지 각자 고민해 보자. 그런데 그건 별건 주제일 뿐이고, 내가 묻고 싶은 바는 이들이 전작인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에서 어마어마한 무게의 질문에 어떻게 그렇게 명료하게 응답할 수 있었느냐는 것이다.
대답은 저자들이 수집한 자료와 방법론에 있다. 저자들의 2001년 <미주경제리뷰>에 실린 ‘비교경제발전의 식민지 기원’이란 제목의 논문을 찾아보자. 논문집 1397쪽에 70여개 국가에서 수집한 자료의 목록이 담겨 있다. 어떤 동네 아저씨라도 이 인민이 저 사람들보다 왜 더 잘사는지 한마디쯤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을 지목하고, 그 설명이 타당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해서 제시하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나 뉴스를 팔아서 성공해보자고 다짐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성공하는 이는 소수일 뿐인데, 자신의 성공을 설명할 수 없는 한 지속적 성장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게 자료기반 언론개혁론이 주장한 바다. 실패하고도 설명하지 못하는 처지에 자족하고 있다면, 그건 실패에도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되고 만다. 지금은 우리 언론이 그 무엇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 관건인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