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연 11년만의 복귀작이자 유작
한국적 SF 표방한 연상호 감독 작품
인공지능 전투용병이 된 ‘정이’와
그의 딸인 연구소 팀장 이야기
오는 20일 공개되는 넷플릭스 영화 <정이>는 지난해 고인이 된 배우 강수연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다. 연상호 감독은 12일 서울 롯데시네마 건대입구에서 열린 제작보고회에서 “강수연 선배가 ‘한 번 해보자’고 한 순간부터 <정이>라는 프로젝트가 시작됐다”며 “처음 선배와 통화하고 났을 때 반소매 티셔츠가 땀으로 다 젖을 정도로 떨렸다”고 회고했다.
영화 배경은 22세기다. 인류는 지구의 해수면 상승으로 우주로 이주를 결정한 뒤 인간이 살 수 있는 ‘쉘터’를 만든다. 쉘터가 자리 잡아 갈 때쯤 일부가 스스로를 아드리안 자치국이라 선언하며 공격을 퍼붓는다. 매 전투 승리하던 ‘영웅’ 정이 팀장(김현주)은 아드리아 자치국과의 대결에서 패배한 뒤 죽을 위기에 처한다. 죽음 직전 정이의 뇌는 인공지능 전투용병으로 복제된다. 연구소 소장 상훈(류경수)과 직원들은 인공지능 전투용병이 된 정이 팀장에게 전원을 꽂았다가 빼기를 수차례 반복하며 그의 뇌를 들여다본다. 일부러 정이 팀장의 다리에 총상을 입히는 등 그가 승리하지 못한 마지막 전투에서 이길 수 있을 방법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한다. 이 실험 중심에는 정이의 딸인 크로노이드 연구소 팀장 서현(강수연)이 있다.
강수연은 2011년 임권택 감독의 <달빛 길어올리기>를 마지막으로 상업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가 10여년 만에 <정이>로 복귀를 알렸다. 촬영을 마친 후인 지난해 5월 급성뇌출혈로 갑자기 세상을 떴다. <정이>는 강수연의 첫 SF물, 첫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작품이자 유작이 됐다.
제작진은 회색과 푸른색의 중간쯤 되는 음산한 분위기로 암울한 지구를 그려냈다. 끝없이 고통스러운 뇌복제 실험을 하는 AI 전투용병이라는 소재도 음울하다. 강수연은 엄마 잃은 아이의 말하기 어려운 심정을 차분하게 표현했다. 김현주가 연기한 전투용병 정이의 액션 속도는 빠르지 않지만, 정이의 초점은 파괴적 액션보다는 진한 모성애에 있다.
스토리는 복잡하진 않다. 러닝타임도 1시간38분으로 최근 영화 추세에 비해 짧은 편이다. SF 설정 속에 쭉 짜낸 감정은 결국 엄마와 딸의 사랑이다. 강수연은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고전적 목소리와 말투로 서현 팀장을 연기한다. ‘요즘 시청자’에게는 이질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딸을 향한 엄마의 애정, 엄마를 향한 딸의 마음이 한데 뭉쳐지면서 그의 목소리에는 ‘깊은 사랑’의 감정이 묻어난다.
영화가 클라이맥스로 치달을 즈음 서현은 엄마를 향해 “곧 잠들 듯이 숨을 거둘 겁니다”라고 말한다. 이어 “제발” “편하게” “눈” “감으세요” 이 네 단어를 한 단어씩 끊어가며 엄마에게 건넨다. 촬영 중 연상호 감독을 포함한 제작진과 배우 누구도 강수연의 별세를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이 장면은 예기치 않게 의미심장한 장면이 됐다.
이날 공개된 영상에서 강수연은 “가장 한국적인 SF영화를 만들어보고 싶다는 연상호 감독의 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현주는 “처음 (강수연) 선배님과 (연기)하게 된다고 했을 때는 ‘내가 할 수 있나’라는 생각에 겁을 많이 냈는데, 현장에서는 누구보다 진지하고 열정적인 동료였다”고 돌이켰다. 류경수 역시 “선배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며 “강수연 선배님과 연기할 수 있었던 건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두 배우는 강수연을 떠올리며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연상호 감독은 <부산행> <반도> <지옥> 등에서 독특한 세계관을 그려왔다. 연 감독은 “SF를 처음 접한 소년 연상호가 가졌던 느낌을 <정이>라는 작품을 통해 시청자분들이 받으실 수 있다면 좋겠다”고 말했다. 연 감독은 김현주, 류경수와 <지옥> <정이>를 함께한 데 이어, 새 넷플릭스 시리즈 <선산>도 준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