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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골프장 경기보조원

8년차 골프장 경기보조원(캐디) A씨(37)는 3개월 연습생 기간을 거쳐 신입 캐디가 된 순간을 잊지 못한다. “여자가 아이 키우며 하기 좋은 직업”이라는 얘기를 듣고 시작한 일이었다. “캐디 150명 모두 자기 번호가 있어요. 운동선수 등 번호처럼요. 내 번호가 생겼다는 사실이 좋았어요. 기뻤죠.”

[홀로 일한다는 공포]폭언과 갑질 피해가 일상인 골프장 캐디[플랫]

기대에 부풀었던 마음은 얼마 가지 못했다. 남성 고객 4명의 경기 지원을 나간 자리였다. “너 (성관계) 몇 번까지 해봤어?” 한 고객이 명함을 주며 대뜸 물었다. 다른 고객들은 A씨를 향한 성희롱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고객의 음담패설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손에 쥔 무전기는 무용지물이었다. 무전 내용은 골프장 내 모든 캐디가 듣게 된다. A씨는 “5시간 동안 고객과 밀착해 이동하기 때문에 벗어날 방법이 없다”며 “캐디 교체는 매우 드문 일”이라고 했다.

“우리는 섬처럼 일해요.” 14년차 캐디 B씨는 말했다. 골프장 18홀의 평균 면적은 90만㎡(약 27만평). 캐디 한 명이 최대 4명으로 이뤄진 1개 팀에 경기 지원을 나간다. 라운드가 이뤄지는 5~6시간 동안 캐디들은 각 홀에 흩어져 일한다. 골프장엔 최소한의 폐쇄회로(CC)TV만 설치된다. 골프장 카트에 블랙박스를 설치한 골프장도 많지 않다. ‘비밀 보장’은 고객에게 제공하는 골프장의 주요 서비스 중 하나다. 탁 트인 야외 잔디밭은 어디로든 열린 공간으로 보이지만, 외부의 접근과 시선이 완전히 차단된다는 점에서 폐쇄 공간과 다를 바 없다.

성추행·갑질 부추기는 음주·내기 골프


‘보는 눈이 없는’ 라운드에서 캐디 노동자를 향한 폭언과 갑질은 일상이 된다. 필수 코스처럼 따라붙는 음주, 내기 골프는 캐디의 ‘감정노동’을 가중한다. B씨는 “열이면 열, 열팀 중 아홉팀 정도가 술을 마신다”고 했다. 코스 내 부대시설인 ‘그늘집’에는 막걸리, 정종, 맥주 등 주류가 갖춰져 있다. 규정상 외부 음식물은 반입 금지이지만, 고객이 텀블러나 골프가방에 담아 몰래 들여온 술을 꺼내 마실 때 캐디 혼자 제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B씨는 “한 번은 외부에서 반입한 술을 드시는 고객들을 제지했다가 경기 내내 괴롭힘을 당했다”고 했다. 방법도 다양하다. “우선 규칙을 무시하고 짧은 채로 단거리 샷만 쳐요. 캐디는 샷을 칠 때마다 ‘그린 서브’를 해야 하는데, 일을 더 시키는 거죠.”(A씨) “공을 엉뚱한 데로 쳐서 찾아오게 하는 건 다반사고요. 클럽(골프채)을 버리고 온 뒤 찾아달라고 하는 일도 있어요. 못 찾게 되면 캐디가 배상해야 하는 점을 악용하는 거예요.”(C씨) 경기 중 노상 방뇨도 비일비재하다. D씨는 “캐디가 있어도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싼다. 고개를 돌리고 못 본 체 한다”고 말했다.

한국레저산업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골프 인구는 515만명으로 사상 처음 500만명을 넘어섰다. 남녀노소가 즐기는 대중 스포츠가 됐다고 하지만 성차별은 여전하다. 수도권의 골프장 2곳은 남성 고객만 정회원으로 받아 지난해 6월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조치를 권고받았다. 무려 40년 가까이 이어진 ‘전통’이라고 했다. 반면 전국 500여개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 3만2000여명 중 여성 비율은 80%에 이른다.

“골프를 시작한 뒤 처음 필드 라운딩 나가는 걸 ‘머리 올린다’고 하잖아요. 이 말이 성차별이라는 걸 지적하는 보도가 최근에야 나왔어요.” 캐디 E씨가 말했다. 그는 “공이 들어가는 ‘홀컵’을 여자 성기에 빗대고, 골프 용어를 성적 은유로 표현하는 일도 잦다. 여성비하 표현을 여자 캐디가 있는 자리에서 아무렇지 않게 한다”며 “골프가 대중화한 이후로 골프장 예절을 지키는 사람은 더 귀해졌다”고 말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스크린 골프만 치다 보니 골프장 매너 교육은 충분히 되지 않은 느낌이에요.”

성추행 피해 사실 알리자 ‘퇴사 권고’

캐디들은 갑질, 성희롱·성추행 피해 사실을 골프장 측에 알려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오히려 사측과 고객이 ‘한편’이 될 때가 많다. 고객의 캐디 평가는 입막음의 다른 이름이다. 과거엔 대다수 골프장이 평가 항목에 ‘용모 단정’ 항목을 포함했다. 15년차 캐디 F씨는 “고객 평가는 캐디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라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불친절하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쉬쉬하게 된다”고 말했다.

피해 사실을 알리면 사측이 2차 가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 2020년 캐디 연습생이던 G씨(당시 23세)는 남성 고객에게 성추행 피해를 당했다. 고객은 8번홀을 돌던 도중 골프채를 들고 ‘어드레스(준비)’ 자세를 취하는 척하다 갑자기 골프채로 G씨의 엉덩이를 쳤다. “언니, 나 신고할 거야?”라는 말도 했다. G씨는 사건 당일 직장 상사에게 이 같은 사실을 알렸으나, 돌아온 답은 “문제 삼는다면 퇴사해야 할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G씨는 사건 발생 6일 뒤 고객을 강제추행 혐의로 고소했다. 골프장엔 사직서를 내야 했다.

인천지법 부천지원 김태현 판사는 지난해 11월 해당 고객에게 벌금 600만원을 선고했다. 1심 판결문에는 “골프장 측에서 고객에 대한 정당한 이의를 제기하는 직원에게도 불이익을 주는 것을 보여 소속 직원이 고객에 대해 불리한 진술을 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는 내용이 담겼다. 가해자의 무고 주장을 배척한 것이다. 2018년 인천 드림파크CC 골프장에서는 캐디를 관리하는 용역업체가 고객에게 폭행당한 캐디를 징계해 논란이 됐다.

캐디들은 “우리는 몸종이 아니다”라고 입을 모았다. A씨는 “캐디는 전문지식을 가진 경기보조원”이라며 “라운드를 나갈 때마다 고객의 동반자라는 생각으로 임한다”고 했다. B씨는 “제가 라이(골프에서 공이 멈춰 있는 위치나 상태)를 봐주고 공이 잘 맞으면 그 쾌감은 말로 못한다”며 “우리가 고객을 생각하는 만큼 캐디를 존중하는 문화가 자리 잡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 이유진 기자 yjleee@kh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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