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 문항’이라는 대통령 한마디가 교육계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처럼, 킬러 문항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라는 문제의 ‘졸(卒)’일 뿐이지만 졸지에 모든 문제의 원흉이 되어버렸다. 수능은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시험이다. 선다형 위주로 출제되고 짧은 시간 안에 풀어야 하기 때문에 암기와 연습 강도, 문제풀이 기술 등이 성적을 크게 좌우한다.
또한 수능은 재학생보다는 재수생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시험이다. 실제로 2019년 정시 비율이 높아지면서 재수생이 해마다 강세를 보여왔고, 최근 인서울 대학의 재수생 비율은 10명 중 3명꼴이다. 매년 15만명이 재수를 하며, 이 중 절반은 ‘반수생’이다. 서울대·연대·고대 합격자 중 20%가 다시 반수를 한다. 놀라운 숫자이다.
재수 또는 삼수는 인구소멸 시대에 청년층의 사회진출을 지연시키는 심각한 사회문제이며, 수능은 재수를 부추기는 주범이다. 만일 정부 주장대로 수능과 사교육 시장이 ‘이익 카르텔’을 형성하고 있다면, 단순히 킬러 문항을 넘어서 재수생이 유리한 지금의 수능 중심 입시 판세를 뒤집고 사교육 시장 자체를 축소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
그 가능성 중 하나는 대학 입시를 ‘대학 입학’과 ‘전공진입’이라는 두 단계로 구분하고, 대학 입학 시기로 몰리던 경쟁 압력 중 일부를 전공진입 단계로 분산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대학 밖에서 이루어지던 경쟁을 대학 안으로 끌고 들어오는 것이다. 이런 방법은 실제로 북미 또는 유럽에서 활용되고 있다. 우리 재수생들이 수능 사교육 시장에서 시간과 돈을 쓰는 동안, 북미나 유럽 학생들은 일단 대학에 진입한 후 전공진입 단계에서 다시 경쟁한다. 프랑스나 독일은 특정 학과나 대학에 신입생이 몰리면, 일단 입학시킨 후 성적에 따라 2학년 때 다른 대학이나 학과로 보낸다. 미국은 졸업할 때까지 3분의 1의 학생들이 편입을 경험한다. 우리나라 재수생 비율과 비슷하다.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15만명의 재수생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고등학교 교육과정을 반복하는 소모적 경쟁 구조를 끊어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대학 입학과 전공진입 단계를 구분하고, 전공진입을 위한 경쟁을 대학 내부에서 흡수하는 새로운 경쟁제도를 마련해볼 수 있다. 학생들이 일단 입학 가능한 대학의 교양과정에 입학해 학부 교양과정 이수-학부 전공진입-전공변경 혹은 다른 대학 전공과정 편입-대학원 진학 등의 경로를 밟도록 하는 내부 경쟁체제가 정착될 경우 매년 10만명 이상의 재수생들이 대학 안으로 들어오는 순증 효과가 있다.
이를 위해 대학 간 편입 이동 총규모를 대학 정원의 30% 정도까지 확대하는 한편, 대학 내 또는 대학 간 이동을 가로막는 장벽을 낮추고 대규모 이동을 허용할 필요도 있다. 최상급 대학에 대해서는 다른 대학에서 진입해 들어올 수 있는 별도의 정원을 마련한다. 전공진입을 위한 선발 기준은 별도의 시험이 아니라 기초과정에서 획득한 평균평점(GPA)에 의거하되 예컨대 수학·과학·언어·글쓰기 등 대학 학문 기초과정, 그리고 전공 진입 시에 요구될 수 있는 4~5개의 전공 선이수 과목들 성적이 될 수 있다. 일부 전공들, 예컨대 의대나 법대, 경영대나 사범대 등은 일시적인 초과 정원을 인정하거나 아예 1학년 신입생을 선발하지 않고 전공진입 때 전국 단위에서 편입 또는 진입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둘 수도 있다.
학생들도 일단 ‘대학 공부’를 경험하게 되면 막연히 이전까지 부모가 권유했던 의대나 법대 이외에도 다양한 학문과 진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때 막연히 생각하던 대학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게 된다. 이를 두고 혹시 1980년대 초 실패했던 ‘졸업 정원제’를 떠올릴 수도 있지만, 당시 실패 원인은 대학 간(혹은 대학 내) ‘이동’ 경로가 차단돼 있었고 전과·전학·편입학 등이 거의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2차 경쟁을 관리하게 될 각 대학의 교양과정 전담 학사기구들(예컨대 학부 대학) 부담은 엄청나게 늘어날 것이고, 2학년 이후 전공진입생을 유인하고 확보하기 위한 각 전공 프로그램의 고민도 커질 것이다. 기초대학 교수들은 대학 교육의 황폐화를 우려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대학 역할과 부담이 커질 수 있지만, 거대한 사교육 시장과 15만명이 넘는 재수생 문제를 넘어서는 첫걸음이 될 수 있어 시도해볼 만하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 70여년 동안 제대로 된 고등교육 정책이 있었더라면 대학입시 문제도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학과 교육부 책임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