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업계 되풀이되는 ‘페미니즘 마녀사냥’···그들은 왜 보호받지 못하나

2023.07.27 16:35 입력 2023.07.27 17:43 수정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들

캐릭터 신체 노출 적다고 업체 항의

일러스트레이터 신상 털고 평점 테러

항의 방문 하루 만에 업체 “계약 종료”

모바일게임 ‘림버스 컴퍼니’ 제작사 프로젝트 문이 지난 25일 자사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 해지를 발표하며 올린 입장문 갈무리.

모바일게임 ‘림버스 컴퍼니’ 제작사 프로젝트 문이 지난 25일 자사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 해지를 발표하며 올린 입장문 갈무리.

한 게임회사가 개인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페미니즘 관련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와 계약을 해지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고 있다. 게임업계의 ‘사상 검증’이 또다시 비판의 도마에 올랐다.

낙태죄 폐지 옹호·불법촬영 반대가 해고 사유?

게임 유저들이 문제삼은 게임 캐릭터 일러스트 일부. 림버스 컴퍼니 사이트 갈무리

게임 유저들이 문제삼은 게임 캐릭터 일러스트 일부. 림버스 컴퍼니 사이트 갈무리

이번 논란은 모바일 게임 ‘림버스 컴퍼니’ 유저들이 여성 캐릭터 복장을 문제삼으면서 불거졌다. 지난 21일 게임사 프로젝트 문은 자사 SNS에 해녀복을 입은 여성 캐릭터 일러스트 영상을 게시했다. 온라인커뮤니티에서는 ‘여성 캐릭터의 노출이 적다. 회사에 페미가 있다’며 소속 일러스트 작가들의 ‘신상 털기’에 나섰다.

이후 게임 캐릭터 제작에 참여한 한 일러스트 작가가 과거 개인 SNS에 낙태죄 폐지 옹호, 불법촬영 반대 집회 등과 관련된 글을 올린 사실이 알려졌고, 남성 유저를 중심으로 게임 평점란에 ‘1점’을 주는 별점 테러가 이어졌다. 일부 유저들은 회사로 찾아가 ‘남캐(남자캐릭터)는 노출이 많고 여캐는 적은 것은 특정 사상에 영향을 받은 것 아니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게임 이용자 10여명이 회사를 직접 항의 방문한 지 하루 만인 지난 26일 김지훈 프로젝트 문 디렉터는 공지를 통해 여성 일러스트레이터와의 계약을 종료하겠다고 알렸다. 김 디렉터는 “이전부터 SNS상 계정이 회사와 연관될 가능성을 없애 달라고 당부했다”며 “재차 주의드렸던 사내 규칙에 대해 위반이 발생한 건이기에 해당 일러스트레이터 작가와 계약 종료할 것”이라고 밝혔다.

게임업계의 ‘페미니즘 사상검증’이 논란이 된 건 처음이 아니다. 2016년에는 넥슨 게임 ‘클로저스’ 성우가 트위터에 ‘메갈리아’ 후원 티셔츠를 입은 인증사진을 올렸다가 남성 유저들의 항의를 받고 교체됐다. 2018년에는 게임 유저들이 산업 종사자들에게 ‘페미니스트가 아니라고 밝히라’고 요구하는 일도 벌어졌다.

반인권적 ‘페미사냥’, 게임업계에선 왜 먹힐까

지난 2019년 12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게임업계 사상검증과 블랙리스트 규탄 및 피해복구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지난 2019년 12월 서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열린 게임업계 사상검증과 블랙리스트 규탄 및 피해복구 촉구 기자회견에서 참석자들이 노동권 보장을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

게임 산업 종사자들은 특히 게임 업계에서 ‘페미니스트 검열’ 논란이 끊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업계 전반에 만연한 반페미니즘 정서와 ‘쉬운 해고’가 가능한 고용환경이 얽혀있다는 것이다.

개발자 A씨는 27일 통화에서 “남성 유저들의 목소리가 과잉대표된 데 더해 ‘메갈 찾기’가 일종의 놀이처럼 굳어졌다”며 “회사도 자사 노동자를 보호하기보다 유저들이 떼를 쓰면 들어주는 식의 대응을 하면서 문제가 반복되고 있다”고 했다. 프리랜서 일러스트레이터 B씨는 “대체 인력을 구하기 쉽다는 이유로 부당해고가 일상화된 것도 문제”라며 “기본적으로 업계 자체가 남초에 반페미니즘 정서가 주류다. 서브컬처(하위문화)라는 이유로 주류 언론 관심도도 낮다 보니 상식 밖의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고 했다.

사상검증 논란은 디지털콘텐츠 창작 업계 전반으로 확산하는 양상이다. 범유경·강은희·이도경 변호사가 지난해 발표한 ‘디지털 플랫폼 콘텐츠 창작 노동자의 노동 조건에 관한 연구’ 결과 보고서에 따르면 심층면접에 참여한 디지털 플랫폼 콘텐츠 창작 노동자 21명 중 15명이 사상검증을 직접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 중 12명은 반페미니스트들이 검증의 주체였다고 답했다.

‘최약체’ 프리랜서 노동자···“제도적 보호 필요”

김유리 전국여성노조 조직국장은 “게임 산업에 종사하는 일러스트레이터나 창작자들은 예술인권리보장법이 적용되지 않는 등 노동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2020년 국가인권위원회는 게임업계의 페미니즘 사상 검증에 대해 인권침해와 차별을 인정하면서도 근로기준법상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진정을 각하했다.

김 국장은 “사상검증 시도가 실제 해고로 이어지며 ‘승리의 경험’을 축적한 이들이 일종의 집단화를 이룬다는 것도 문제”라며 “어느 선에서는 제재가 이뤄져야 함에도 여성가족부·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의 움직임이 없고,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목소리를 내기 어려운 현실”이라고 말했다.

범유경 변호사는 “‘게임의 주이용층인 남성의 입맛에 맞춰 게임을 만들어야 하고, 페미니스트는 게임 업계에 있으면 안 된다’는 게임업계에 만연한 인식을 고쳐야 한다”며 “일러스트레이터 등 대부분 프리랜서인 여성 노동자들이 부당하게 계약해지를 당했을 때 회사를 상대로 다툴 수 있는 제도적 방안도 시급히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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