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학술대회에 갔다가 흥미로운 표현을 보았다. “도시가 차량 소음 없이 노래할 수 있을까?”
관념상 노래는 살아 있는 존재가 목소리로 부르는 것이다. 위 문장은 도시가 살아 있음을 전제한다. 소설 속이라면 도시 자체가 정말로 생명체가 되기도 하지만(N K 제미신의 <우리는 도시가 된다>처럼) 그건 소설이다. 그러니까 일부분만 사실이다. 우리의 도시는 다양한 존재의 움직임과 소리로 생동한다. 곳곳으로 이동하는 사람의 물결, 혈류처럼 흐르는 교통수단, 도시의 피부를 덮은 다양한 식물, 인간과는 다른 음역을 맡는 여러 생물종이 복합적으로 도시를 살아 있게 한다.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서울 강동구의 ‘둔촌주공아파트’ 단지에 만들어졌던 ‘길고양이 생태계’를 다룬다. 40년 된 아파트 단지에는 그만큼 오래된 나무와 종종 인간에게 밥을 얻어먹으며 대를 이어온 고양이들이 살았다. 재건축은 고양이 주민을 내쫓고 뿔뿔이 흩트리는 일이었다. 아파트 단지에 형성되었던 ‘도시’의 숨을 거두는 일이기도 했다.
자주 언급되는 사실이지만 도시 안에서 인간-기술-환경은 강력하게 연결되어 있다. 외벽이 유리로 된 고층건물 무리는 야생조류를 포함한 생태계를 뒤흔든다. 건물이 높고 밀집하고 유리로 만들어질수록 새가 충돌해서 폐사할 가능성이 커진다. 새의 개체 수가 줄어들면 천적이나 공생 관계에 있는 다른 종의 개체 수가 변한다.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의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야생조류가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경로에 위치하므로 인공 구조물에 조류가 충돌할 위험성이 기본적으로 높다. 따라서 건축물의 위치와 높이를 정하는 단계에서부터 조류의 이동을 반영할 필요가 있다. 건물 디자인에도 조류를 고려할 수 있다. 외벽을 비스듬하게 만들어 반사각을 조절하거나, 불투명한 무늬를 추가하거나, 하다못해 반사 테이프를 붙이는 변화만으로도 새들은 죽지 않는다. 도시라는 이유로 누군가 죽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도시는 어떤 모습이면 좋을까? 앞서 언급한 ‘노래’는 사운드 아티스트인 조지 히라오카 클라크가 발표한 것이다. 그는 ‘솔라펑크’를 테마로 생태도시의 모습을 소리로 구현하고자 했다. 솔라펑크는 재생에너지를 비롯해 지속 가능한 문명에 관심을 두는 운동이다. 펑크(punk)는 본래 폐품이라는 뜻이지만 사회문화적으로 저항과 열정을 의미하게 되었다. SF에서 펑크는 자본주의에 반발한 ‘사이버펑크’ 등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사이버펑크가 계급 격차, 대도시의 암울한 풍경을 그리며 냉소적인 분위기를 띠었다면, <솔라펑크 선언문>은 낙관주의를 지향한다. 낙관하지 않고는 절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날 발표에서 솔라펑크 도시는 햇빛과 녹음의 이미지로 나타났다. 그곳은 자동차보다 지속 가능한 교통수단, 소음을 흡수하는 풍부한 녹지, 새로운 방식의 농업 등을 상정하고 있었다. 클라크의 작업물은 평화롭고 아름답게 소란스러운 소리였다. 새소리가 전면에 있었던 덕이다. 그러고 보니 직접 새 울음소리를 들어본 지가 오래되었다. 도시생활자로서 마음이 쓰이는 점이다. 우리의 도시를 살아 있게 만드는 다른 도시생활자들의 안녕을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