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명 민간인 희생자 발생 소식에
이란·레바논·리비아 등 항의 시위
대사관 습격 시도 및 국기 훼손도
이란·레바논 ‘공식 애도의 날’ 선포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교전이 이어지고 있는 가자지구의 알아흘리 아랍 병원에서 일어난 폭발로 500여명의 민간인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동 전역에서 이를 규탄하는 시위가 번지고 있다.
가디언 등에 따르면 17일(현지시간) 이란, 레바논, 요르단, 리비아 등 중동 전역에서 항의 시위가 촉발됐다. 이스라엘은 가자지구 무장정파인 ‘이슬라믹 지하드’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들은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인한 것이라며 일제히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오니스트 동맹”…미·영·프 등 대사관도 타깃
리비아 수도 트리폴리에서는 수백 명의 시위대가 거리로 나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었고, 일부는 아랍권 국가에서 사용하는 터번 모양의 천인 ‘케피예’로 얼굴을 가린 채 순교자 광장에 집결했다. 이들은 이번 폭발이 ‘시오니스트’(유대민족주의자)의 공격으로 인한 것이라 비난하면서 “가자지구를 위해 우리의 피와 영혼을 바친다”는 구호를 외쳤다.
요르단의 수도 암만에서는 분노에 찬 시위대 수천 명이 모여 이스라엘 대사관을 습격하려고 시도했다. 이들은 정부에 이스라엘 대사관을 폐쇄하고, 이스라엘과의 평화 조약을 파기할 것을 요구했다. 경찰은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최루탄을 동원했다.
이스라엘에 지지를 표한 서방 국가들의 대사관도 시위대의 주요 타깃이 됐다. 레바논 베이루트의 미국 대사관 앞에는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팔레스타인 국기를 들고 “미국에 죽음을” “이스라엘에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쳤다. 경찰이 시위대를 해산하기 위해 여러 발의 최루탄을 쏘는 과정에서 부상자가 발생해 의료진이 출동하기도 했다.
튀니지 주재 프랑스 대사관 앞에도 수백명의 시위대가 모여 “프랑스인과 미국인은 시오니스트 동맹들이다” “튀니지에서 대사관을 철수하라”고 소리쳤다. 레바논 주재 프랑스 대사관 앞에도 수백 명의 시위대가 헤즈볼라 깃발을 흔들고, 대사관 정문에 돌을 던졌다. 이란 테헤란에서도 수백명이 영국과 프랑스 대사관 앞에 모여 “프랑스와 잉글랜드에 죽음을”이라고 소리치며 대사관 벽에 달걀을 던졌다.
분노는 팔레스타인 자치정부로도 향했다. 요르단강 서안지구의 시민들은 마무드 아바스 팔레스타인 자치 정부 수반에 반대하는 구호를 외치며 거리에서 돌을 던지는 등 시위가 격화됐다. 전문가들은 팔레스타인의 안보에 관해 이스라엘과 협력했다는 비판에 직면해 온 아바스 수반에 대한 팔레스타인들의 오랜 분노가 폭발한 것으로 분석했다.
이 외에도 예멘, 모로코, 이라크, 튀르키예 등 아랍·이슬람권 내 다수의 국가에서 수많은 시위가 발생한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시위대는 이스라엘 국기를 찢거나 불태우며 이스라엘을 향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슬람권 국가의 정상들도 앞다퉈 가자지구 희생자를 애도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에브라힘 라이시 이란 대통령은 ‘공식 애도의 날’을 선포하면서 “가자지구의 병원 위로 떨어진 미국·이스라엘 폭탄의 화염이 곧 시오니스트들을 집어삼킬 것”이라고 비난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총리도 이날을 국가 애도의 날로 선포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가장 기본적인 인간적 가치를 무시한 이스라엘의 공격 사례”라며 “가자지구에서 벌어지는 전례 없는 잔혹함을 멈출 수 있도록 모든 인류가 행동에 나서달라”고 밝혔다.
헤즈볼라, 개입 우려 커지나
가자지구 병원 폭발 참사로 전쟁이 점점 더 불확실한 국면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중동의 분노 여론을 등에 업고 레바논 무장조직 헤즈볼라가 개입할 수 있다는 우려도 점점 커지고 있다.
헤즈볼라는 “내일(18일)을 적에 대한 분노의 날로 삼자. 거리와 광장으로 즉시 가서 격렬한 분노를 표출하라”고 촉구했다.
이스라엘과 헤즈볼라의 무력 충돌은 격해지고 있다. AP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병원 폭발 사태가 발생한 이후 이스라엘군은 이스라엘 영토에 침투하려던 헤즈볼라 대원과 교전을 벌여 5명을 사살했다고 밝혔다. 이날 사상자는 양측이 국경지대에서 충돌하기 시작한 이후 가장 많았다.
미 국무부는 이날 레바논 여행경보를 기존 3단계 ‘여행 재고’에서 최고인 4단계 ‘여행 금지’로 상향 조정했다고 AFP통신이 외신이 전했다. 또 국무부는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의 미국대사관에 있는 비필수 직원과 가족들이 레바논을 잠정적으로 떠나는 것을 허용한다고 덧붙였다.
뉴욕타임스(NYT)는 가자지구가 파괴되고 팔레스타인인 사상자가 늘어날수록 헤즈볼라 지지자들 사이에서 대응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NYT는 “가자지구와 레바논, 시리아, 이라크, 예멘의 무장세력들은 이란이나 헤즈볼라에서 비슷한 훈련을 받았고 이제는 같은 팀으로 간주된다”며 “이란이 이 네트워크를 주도하지만 집행하는 건 헤즈볼라”라고 분석했다.
이번 참사로 인해 중동, 그리고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 국가들 사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폭발의 책임이 어느 쪽에 있든 간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력 충돌을 외교적으로 풀기 위한 해법은 한층 어려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