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계보학>(조고은 옮김, 나무연필) 저자는 한국학 연구자이자 동아시아 역사가인 실라 미요시 야거입니다. 미국 오벌린 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로 일합니다. 시카고 대학에서 인류학 박사 과정을 밟던 1987년 샤머니즘 연구를 하러 처음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국의 가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해 6월 민주항쟁을 보고는 연구 주제를 바꿉니다. 한국 학생운동을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기로 한 것입니다. 이 박사 논문을 2003년 미국에서 책으로도 냅니다. 20년이 지나서야 번역이 됐네요.
한국에 관한 영어책만 보고 쓴 책이 아닙니다. 야거는 한국어 능통자라고 합니다. 한글 번역본 각주까지 하나하나 다 확인했다고 하네요. 다만 ‘논문’이 바탕이다 보니 개념어가 많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난해한 말로 도배된 책도 아닙니다.
애인/남편을 위한 절개…새롭게 번역된 옛날이야기
야거가 1980년대 학생운동을 포함한 반체제 운동에서 주목한 건 남성성과 여성성이라는 젠더 문제와 한국인의 국가 관념에 영향을 끼친 유교 서사입니다.
‘옛날이야기’ 한 사례가 <춘향전>입니다. 야거는 “<춘향전>의 장르 전통에 따라 국가적 육체로서의 여성은 외부에서 침입하여 정절을 빼앗으려는 ‘악당’에 의해 자신의 육체가 굴욕적으로 침해당하는 모습과 그럼에도 상실한 애인/남편을 위해 절개를 지키는 모습으로 재현된다”고 말합니다.
주체사상과 새로운 ‘낭만적’ 서사 전략
야거는 김일성 주체사상을 접한 주류 학생운동이 북한을 적으로 규정하는 관제 역사관을 거부하면서 새로운 ‘낭만적’ 서사 전략을 만들어냈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산하 ‘조국의 자주와 평화적 통일을 위한 특별위원회 연합’이 1998년 4월 배포한 전단을 보면, 남녀가 얼싸안는 모습이 한반도 지도에 담겼습니다. ‘말’지 1988년 3월호 삽화는 연인이 행복하게 휴전선 철조망을 넘어가는 장면을 그렸습니다. 문병란은 분단된 남북을 견우와 직녀에 비유한 시(‘직녀에게’)를 썼습니다.
야거는 반체제 운동 참여자들이 한반도의 분단을 “여성-국가-육체에 대한 폭력, 즉 신성한 부부관계에 대한 불온한 침입이자 (외국) 남성이 (선주민) 여성을 지배하는 음탕한 행동” “한민족의 존립과 정체성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다고 분석합니다. 이들은 “한국의 정체성에서 변치 않는 내적 ‘핵심’”을 “정절을 지키는 ‘고결한’ 여성의 능력”에서 찾았다고 봅니다. “반체제 인사들은 한민족 생존의 필수 조건으로 결혼과 통일을 다양하게 연결”합니다. “조국 통일의 약속이 다시 부부/연인 상봉을 바라는 희망의 표현”이 된 거죠. “모종의 낭만적 화해를 위해 로맨스와 애국심을 연결하려는 시도는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통일 프로젝트 이면에 담긴 은밀한 주제가 된다.”
분단 국가 표상이 된 상처 입은 여성의 몸
야거는 “분단된 한반도에서 훼손된 한국 여성의 이미지가 매우 빈번히 등장했다” “현대 한국의 민족주의 담론에서 강간당하고 상처 입은 여성의 몸은 분단된 국가의 표상으로 널리 등장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담론엔 “여성의 미덕 및 정절에 대한 유교적 도덕성을 담은 전통적 고전 서사”도 녹아듭니다.
야거는 김남주의 시 ‘불감증’을 “더러움에 반하는 순결함, 오염에 반하는 정숙함의 가치를 내세웠고, 분단을 강간에 빗대며 성적 함의를 노골적으로 환기”한 작품으로 꼽습니다. 여성 성기를 가리키는 속어에 “미8군 군화 밑에서~” “쪽발이 엔화 밑에서~”라는 수식을 붙인 시구절이 등장하죠.
“일제강점기에는 지식인들이 식민지배의 경험을, 현대에 들어서는 반체제 인사들이 분단의 표현을 강간의 이미지를 통해 드러내고 이를 널리 활용”합니다. 강점기 이광수 등이 “강간당하고 폭행당한 여성의 재현을 일본 식민지배(집 및 고향의 상실)의 상징”으로 활용했습니다.
바람직한 여성의 행실과 통일 담론
야거는 부정한 성관계를 맺거나 이를 강요당한 여성이 “가정의 안정은 물론 한국 가부장제의 연속성 전체에 위협이 되었다. 여성의 정절과 미덕은 단지 부부간의 사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안녕과 관련한 공적 문제”라고 봅니다. 야거는 주체사상, 더 일반적으로는 반체제적 통일 담론 서사에 남성에 대한 여성의 저항 및 바람직한 여성의 행실과 관련된 주제가 들어갔다고 봅니다.
야거는 “여성은 뜻하지 않게 한국 종족의 (내적) ‘순수한’ 상태를 지키기 위한 우려의 대상인 동시에 외국의 (외적) ‘오염’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주체가 된다”고도 말합니다.
‘유교적 남성성’의 위기와 ‘군사적 남성성’의 등장
책은 주로 ‘남성성’을 다룹니다. 야거가 주요하게 다루는 인물은 신채호입니다.
신채호가 을지문덕(1908), 이순신(1908), 최영(1909) 같은 군사 지도자 전기를 주로 쓴 게 한 예입니다. 야거는 신채호가 일본에 완강하게 맞섰지만 일본을 이상적인 근대군국주의 국민국가의 모델로 삼은 점을 지적합니다. 신채호의 다음 글을 두고 한 지적입니다.
야거는 신채호의 ‘영웅적인/사나이다운 남성성’이라는 주제가 박정희에게 영향을 미쳤다고 봅니다. “박정희는 한국의 ‘(남성성이) 거세된’ 과거에 대한 신채호의 견해를 바탕으로 강하고 자주적인 국가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구축했다.” 야거는 박정희의 군사적인 남성성에 관한 담론이 새마을운동에서 가장 뚜렷하게 드러났다고 봅니다. “한국의 ‘게으르고’ 후진적인 농민들을 근면하고 근대적이며 진취적인 애국자로 정신 개조”하는 목적의 새마을운동은 “박정희가 군사적 민족주의를 고취”하려고 만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사적 민족주의 고취하려던 새마을운동
박정희는 “진정한 우리나라 ‘선비’상은 문약에 흐르지 않고 일단 국가가 위기에 빠지면 싸움터에 나서는 애국적 전사”라며 이순신이라는 인물로 구현된 ‘개선된’ 무신의 전통을 제시합니다. 1969년 4월28일 충무공 탄신 제424주년 기념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무사·안일한 태평세월 속에 거듭되는 당쟁과 분열로 혼란에 빠지고 민생이 도탄에 헤매던 날, 10년 앞을 미리 예견하여 부국강병에 의한 예방 전략을 주창하신 것은 오직 선견지명의 경세가(이순신)만이 볼 수 있는 구국의 길이었고 (……)”
새마을운동을 부국강병과 반공과도 연결합니다. 박정희는 “농촌이 살기 좋은 농촌이고, 부유한 농촌, 건전한 농촌, 이런 농촌일 때는 공산당이 우리 농촌에 와서 발붙일 자리가 없을 것”이라고 했죠.
‘새마을 지도자’는 ‘살아 있는 국가 영웅’이 됩니다. 박정희는 1973년 새마을훈장을 신설합니다.
군부 정당화, 민주화 세력 약화 의도의 새마을운동 담론
야거는 박정희의 새마을운동 담론을 군부의 정권 장악을 정당화하고, 민주화 세력의 정치 장악력을 약화하려는 의도의 대항 담론일 뿐이라고 비판합니다.
무능한 한국 남성성의 이미지는 현실을 반영하여 제시된 것이 아니다. 이는 군대 및 군사화된 대중이 이 사회의 새롭고 정당한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수정한 한국사의 버전을 유지시키고, 민주화 세력의 정치 장악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대항 담론으로 제시되었다.
신채호·박정희의 군사적 남성성 거부한 김대중의 남성성
야거는 김대중의 정치와 남성성도 들여다봅니다. 남성성의 긍정적인 측면을 김대중에게서 찾을 수 있습니다. “김대중의 정치는 신채호와 박정희가 이상화하던 (군사적) 남자다움의 형식을 선택적으로 거부”합니다.
“우리는 아무리 강해도 약합니다. … 두렵지 않기 때문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다. 두렵지만, 나서야 하기 때문에 나서는 것입니다”라는 김대중의 발언을 두고 이렇게 썼습니다.
“신채호와 박정희가 주장하던 남성성의 이상과는 상당히 대조적으로, 김대중은 불굴의 강인함과 동시에 취약성과 유약함을 가진 남성을 이상화한다. 그의 힘은 육체적 역량이 아니라 정신력에서 나온다.”
김대중이 군사정권 독재자들을 용서한 것이나 “용서하지 않으면 전투에는 이기더라도 전쟁에는 집니다” 같은 발언을 예로 들고는 이렇게 적었다. “김대중의 정치가 이상화하는 남자다움의 형태는 적에 맞서 싸우는 투사도, 생존 투쟁에서 살아남는 ‘적자(適者)’도 아닌, ‘그저 견디는’ 남자이다.”
용산 전쟁기념관에 녹아든 ‘남성성’도 분석 대상입니다. 전쟁기념관은 “지금은 상실하여 잊힌 군사 전통, 그 ‘남자다운’ 과거와 연결되는 고대 한국을 미화하는 동시에, 고대의 군사적 가치를 ‘회복’시켜줄 현대 한국의 새로운 모습을 강조하는 기념물”입니다. 이 기념물에도 ‘고유 혈통’에 대한 집착이 들어갔습니다.
전쟁기념관엔 국군 형과 인민군 동생이 포옹하는 모습을 조각으로 재현한 ‘형제의 상’이 있죠. 야거는 이 조각상 의미도 여러모로 분석합니다.
남성성의 승리 (혹은 패배) 서사와 불가분하게 연결된 국가의 정당성은 다음과 같이 매우 친숙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형님은 영웅적이고 고결하며 한국의 영광스러운 ‘남성적’ 과거의 정당한 ‘계승자’였다. 반면에 아우는 약하고 여성적이며, 나아가 합당한 자격을 가지지 못했다. 이러한 형제애의 수사는 극도로 엄격한 가족의 위계질서와는 양립할 수 없다. 본래의 조상으로부터 진정한 ‘혈통’을 물려받은 후손으로 승인받아야만 비로소 조국 통일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형님인 남한만이 유일하게 적법한 상속자이다.
남북을 남녀가 아니라 형제에 빗댄 것도 생각할 거리인 듯합니다.
야거는 학생운동 세력이 늘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김일성이라는 인물로 의인화된 자애로운 부성의 ‘회복’에 몰두한 점도 분석합니다. “학생들은 자신들을 (이상적 남성성의 모범과 결부되며 이를 통해 완성되는) ‘애국적’ 영웅으로 개념화했고, 특히 역사에서 자신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규명하는 과정에서 동원된 특성을 김일성에게서도 찾아내려 했다.”
야거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연구하면서 명백히 밝히려는 것이 있다고 했습니다. 바로 사상이나 이데올로기적 개념이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문화나 집단에서 비롯한 것이든 ‘종속된’ 곳에서 비롯한 것이든 결코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거나 해방적이지는 않다는 점입니다.
<애국의 계보학>은 한국에 처음 번역된 야거의 책입니다. 야거는 유명 한국학 연구자 중 한 명입니다. 이까지 읽으신 분들을 위해 ‘트리비아’ 하나 전합니다. 야거는 미국 등지에선 버락 오바마가 미셸을 만나기 전 사랑했던 여성으로 더 유명합니다. 오바바는 야거에게 두 번 청혼했습니다. 2017년 역사학자 데이비드 개로우가 출간한 오바마 전기 <떠오르는 별>에 만남과 청혼, 이별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인종, 정치, 사랑, 야망이 과연 무엇인지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사연이 나옵니다. 네덜란드계와 일본계 부모를 둔 야거는 한국계 미국인과 결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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