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변(不變)의 기록, 10년의 두드림’. 얼마전 문화재청과 불교중앙박물관이 개최한 학술대회의 명칭이다.
대체 무엇이 ‘불변의 기록’이고, 또 무엇을 ‘10년간 두드렸다’는 걸까.
‘불변의 기록’이란 금속이나 돌로 만든 유물에 새겨(써) 넣은 명문(글씨)인 ‘금석문’을 가리킨다.
이 금석문은 당대 사람들이 직접 남긴 생생 기록물이라는 점에서 필설로 다할 수 없는 1차 사료의 가치를 갖는다.
‘두드림’은 ‘탁본’을 뜻한다. 비면에 종이를 대고 그 위에 먹 방망이를 톡톡 두들겨 명문을 뜨는 행위를 가리킨다.
2013년부터 10년간 전국 금석문 708점의 탁본조사를 마쳤고, 이번에 그 성과를 보고하는 학술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너무도 선명한 탁본
학술대회 자료집 중에 필자의 눈을 사로잡은 발표문이 있었다.
‘무의사 선각대사 탑비’(946·보물)의 탁본 해석이었다.(하일식 연세대 교수)
이 탑비(부도비)는 전남 강진 무위사에 서있는 후삼국시대 승려 선각대사 형미(864~917)의 행적을 기록한 비석이다.
이 탑비문을 작성한 이는 당나라 과거(빈공과) 급제자 출신으로 고려 조정에 출사한 문장가 최언위(868~944)였다.
이 탁본을 검토한 하교수는 두 번 깜짝 놀랐다고 한다. 처음엔 불교중앙박물관이 책임진 탁본의 질이 ‘차원이 다르다’고 할 만큼 선명한 것에, 두번째는 그것을 토대로 풀이한 비문 내용에 놀랐다는 것이다.
“이토록 선명한 탁본으로 기존 판독의 꽤 많은 글자들이 교정되고, 비문 해석도 완전히 달라질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
우선 이 비문에서 고려 왕건의 태(胎·태반과 탯줄)이 개성 오관산에 묻혀있고, 태봉국의 궁예(재위 901~918)가 선각대사를 고문하여 잔인하게 죽인 정황 등이 새겨져 있다는 것 등이 새롭게 판독되었다.
■태조 왕건의 태를 묻은 곳
문제의 비문 내용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비문은 ‘금상(今上·태조 왕건)이 즉위하자(918) 선각대사를 ‘송악(개경)으로 초청한 경과’를 태조의 직접화법으로 전한다.
“(917년) 돌아가신 선각대사가 낙토(樂土·송악·개경)에 거둥했고, 과인이 (대사를) 우러러 받들며 공손히 귀의했다”면서 “이렇게 얻은 대사를 잃은 아픔이 간절했다”고 추모했다.
그러면서 태조는 “…대사의 49재를 지내라”고 지시한 뒤 선각대사의 묘소를 특정해준다.
“개주(개성) 오관산은 과인의 태를 묻은 곳이다. 산봉우리가 빼어나고 지맥이 평안하여 묏자리로 마땅하니….”
지금까지는 ‘개주의…는 태를 묻은 곳(之藏胎處)’이라고만 해독되었다. 그런데 이번에 뜬 선명한 탁본에서는 ‘과인(寡人·태조의 자칭)’과 함께 ‘오관산(五冠山)’자가 새롭게 읽혔다. 오관산은 개성 용흥동과 장풍군 월고리와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다섯 개의 봉우리가 갓처럼 생겼다 해서 오관산(五冠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번에 뜬 탁본에서 ‘태조 왕건의 태가 묻힌 개성 오관산’이라는 사실을 알게되는 망외의 소득을 올린 것이다. 물론 어떤 사료에도 없는 내용이다.
■걸주와 같은 폭군
또 하나 이번에 선명하게 읽어낸 단어가 있으니, 그것은 ‘걸주(桀紂)’였다.
즉 “당시의…위태로움은 걸주시대(桀紂之年)보다 더하고, 어지러움은 유비·조조 시대(劉曹之代)보다 심했다”는 것이다.
‘걸주’는 폭군의 대명사인 걸왕(하나라)과 주왕(상나라)을 일컫는다. 유비·조조 시대는 3국이 각축을 벌인 혼란기를 뜻한다.
‘걸주’는 궁예를 가리키고, ‘유비·조조 시대’는 후삼국 분립상을 지칭한 것이 틀림없다.
또 “위로는 성주(聖主·성군)가 없이 고슴도치 무리가 사방에 깔려 있는 것 같고, 아래로는 고래들…어려움…사해가 비등하고 삼한이 떠들썩하게 어지러웠다”고 했다. ‘간사하고 포악한 무리’(고슴도치) 때문에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왕건의 위엄에 고개를 숙이다
비문에는 궁예왕의 지시를 받은 왕건이 전라도 나주 지역을 평정하면서 선각대사를 초청하는 자초지종이 새겨져 있다.
왕건이 바닷가에 은거하고 있던 선각대사에게 단조(丹詔·임금의 조칙)를 보냈다는 것이다.
그러자 선각대사가 제(制·임금의 말씀)를 받들어 물살을 헤치고 사나운 풍랑을 거쳐 달려갔다.
이 대목에서 새롭게 읽어낸 글자가 있었으니 그것이 ‘친규호익(親窺虎翼) 암축용이(暗縮龍이)’ 가운데 ‘턱 이’자 이다.
기존에는 이 글자를 ‘머리 두(頭)’자로 판독했기에 해석에 혼란이 많았다.
그래서 “대사의 용과 같은 지혜를 가만히 숙이셨다”든가, “왕은 좌우에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 세워둔 용두(龍頭)를 치우기까지 했다”느니 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해석이 난무했다. 그러나 ‘머리 두(頭)’자가 아니라 ‘턱 이’로 판독하면 쉬워진다. 즉 “선각대사가 용맹스런 왕건의 위엄을 간파하고 고개를 숙였다(턱을 내렸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선각대사가 왕건의 군세를 보고 귀의를 결심했다는 시나리오이다.
■‘왕’ 아닌 이를 ‘왕’으로 표현한 까닭
이쯤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겠다. 왕건이 선각대사를 초청하면서 ‘단조(丹詔·임금의 조칙)’나, ‘제(制·임금의 말씀)’라는 표현을 ‘감히’ 썼다는 것이다. 하긴 ‘대왕(大王)’자도 3번 나온다. ‘대군(大君·큰 임금)’과 ‘금상(今上·현 임금)’, ‘자니(紫泥·임금의 조서)’ 등의 표현도 보인다. 이를 두고 그럴 듯한 견해가 제기된 바 있다.
즉 나주를 비롯한 전라도 정벌에 나선 것은 궁예의 명을 받은 왕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조’나 ‘제’의 표현을 쓸 자격을 갖춘 왕인 궁예라는 것이다. 그 궁예가 선각대사 같은 선종 승려들을 적극 포용했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번에 선명한 탁본을 검토한 결과 달리봐야 한다고 견해가 제기됐다.(하일식 교수)
이 비문은 고려로 귀의한 최언위가 태조 왕건 재위 시절인 930년대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에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기 이전, 즉 태봉국 시절의 과거 활동을 서술하면서 ‘대왕’이나 ‘대군’, ‘금상’으로 지칭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왕이 되기 전 왕건의 언행에도 임금에게나 붙일 수 있는 ‘단조’와 ‘제’, ‘자니’ 등의 용어를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반면 전 임금인 궁예에게는 혼군(昏君·어리석은 임금)이니 ‘걸주(폭군)’라고 극언했다.
■의심은 또다른 의심을 낳았다
이번 탁본 분석의 고갱이는 역시 ‘잔학한 궁예의 재확인’이라 할 수 있다.
이 대목을 두고 기존의 판독문은 도대체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문화재청이 제시한 기존 판독문을 살짝 인용해본다.
“태조는 봉필(鳳筆·임금의 편지)을 보내 대사를 궁중으로 초빙하여 자취가 끊어진 공사상에 대한 법문을 듣고 무언(無言)의 이치인 선리를 알고자 하였다. 대사가…주상이 당상(堂上)에 우뚝 서있는 것을 보고, 그 단예를 헤아리기 어려워 거조(擧措)를 잃었으니, 해를 취하여 현묘하고 높은 이치를 회복할 것을 생각 하겠는가…마침내 거짓 시대를 만났다.”
마치 암호문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번 탁본을 면밀하게 검토해본 결과, 궁예의 잔혹한 취조장면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이 부분의 비문은 “두루…무고한 사람을 마구 죽이니, 이에 어려움을 당한 경우가 구름 모이듯 꽉 차서 함께 (선각대사는) 유죄로 몰렸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때 대사는 “완전히 나라를 옮겼다(고국인 후백제와 관계를 완전히 끊고 태봉국에 귀순했다)”고 항변했다.
그러나 “(궁예는 그 말을 믿지 않고) 오직 사람을 삼킬 듯 고함칠 뿐”이었다. 이 대목에서 비문은 “궁예가 의심이 많은 것이 또한 불신을 낳는다고 할 만했다(多疑亦生不信)”고 덧붙였다. ‘의심이 또다른 불신을 낳았다’는 것은 대사를 향한 의심이 이어졌음을 암시한다. 이때 왕건이 변호에 나선다.
■“부엉이처럼 서서 다그쳤다”
비문은 “(917년) 대왕(왕건)이 봉필(편지)를 궁궐에 보내 (궁예에게 선각대사가) 이미 (후백제와) 자취를 끊은 이야기를 전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간주됐다(무시당했다)”고 했다. 이때부터 생생한 직접화법이 동원된다.
“(혐의를 뒤집어 쓴) 선각대사가 황망히 궁궐에 들어갔다. 그때 주상(궁예)이 전각 마루에 부엉이처럼 우뚝 서 있었다.(主上鶚立當軒) 대사는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 지 알 수 없어 어쩔줄 몰랐다.(難測端倪 失於擧措)”
선각대사는 순간 살기를 느낀 것 같다.
“현고가 붙잡혀 죽임을 당한…혼군(昏君)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취조를) 마치니 거짓으로 바른 것을 대체했다…”
언급된 현고(402~444)는 북위 태무제(423~452)의 폐불 때 처형된 승려이다. 선각대사가 포악한 궁예에게 박해를 받아 죽임을 당한 것을 빗대 표현했다. ‘혼군’(어리석은 군주)은 당연히 ‘궁예’를 가리킨다. 이때 왕건이 등장한다.
왕건은 어떤 해명도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 같다. 왕건은 선각대사에게 “우리 스님은…세상을 이끄는 스승이니 어찌 삶과 죽음이 있을까만은 피안(彼岸·깨달음의 세계)과 차안(此岸·현세)은 있겠지요”라고 위로한다.
한편 대사는 “거복(거僕)의 음모를 목에 걸칠 것이며, 은혜를 품고서 어찌 상신(商臣)의 악행에 섞이겠느냐”고 당당히 맞선다. 하일식 교수는 이 대목에 주목하라고 주문한다. 즉 ‘거복’은 중국 춘추시대 거국의 군주인 기공의 태자 ‘복’을 가리킨다. 기공이 계타라는 아들을 아껴 태자(복)를 내치려 했다.
그러자 거복은 호위병의 힘을 빌어 아버지(기공)를 시해한 뒤 노나라 선공(?~기원전 591)에게 보물을 바쳤다. 또 ‘상신’은 초나라 성왕(기원전 671~626)의 태자였다. 아버지 성왕이 태자를 바꾸려 하자 난을 일으켜 성왕을 자진케 하고는 왕위에 올랐다.(초나라 목왕·기원전 626~614)
선각대사가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면서 아버지를 죽인 거복과 상신을 거론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 선각대사가 궁예왕을 폐하고 태자를 왕위에 세우려 한다는 누명을 뒤집어 쓴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혐의를 부인했지만 대사는 참혹하게 죽임을 당한다. 비문을 보자.
“(대사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궁예는) 한마디도 받아들이지 않고 끌고가 심하게 도륙했다.”
비문의 구절은 ‘끌고가서(遷) 죽였다(戮)’면서 ‘더한 잔인한 행위가 있었다(仍加)’고 덧붙였다. 도륙한 것으로 모자라 시신을 모욕하는 행위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두 왕자의 죽음과 어떤 관계?
이번 비문의 판독은 <삼국사기>와 <고려사> 등에 등장하는 궁예 관련 기사를 떠올리게 한다.
우선 비문의 ‘(궁예가) 의심이 많다(多疑)’는 구절에서 기시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삼국사기> ‘열전·궁예’조를 보라.
“의심이 많아지고, 돌연 화를 내어(多疑急怒) 죄없이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했다. 그뿐이 아니다. <고려사> ‘세가·태조’는 “궁예가 반역죄를 엮어 하루에도 100여 명을 죽여서 장수나 재상 가운데 해를 입은 자가 십중팔구였다”고 했다.이 대목에서 그 악명높은 ‘미륵관심법’이 등장한다.
“(궁예는) 늘 ‘나는 미륵관심법을 체득하여 부녀자들이 몰래 간통을 한 것도 알 수 있다’고 했다. 궁예는 쇠절구공이를 불에 달궈 음부에 찔러 넣어…죽게 했다…아녀자들 벌벌 떨었으며 원망과 분노가 날로 심해졌다.”
그런데 비문 중 선각대사의 항변에 거론된 ‘거복·상신’ 고사가 영 마음에 걸린다. <삼국사기> ‘열전 궁예’전을 보자.
“915년 부인 강씨가 왕의 잘못된 정치에 대해 ‘그러시지 마라’고 정색하며 자주 간언했다. 그러자 궁예는 ‘네가 다른 자와 간통했느냐’고 힐난하면서 ‘내가 신통력으로 보았다’고 질책했다. 결국 뜨거운 불에 달군 쇠 절굿공이로 강씨의 음부를 찔러 죽이고 두 아들도 죽였다.”
이 대목이 수상하다. 궁예가 두 왕자와 결탁한 무리가 자신을 축출하려 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강씨와 두 왕자를 죽이고, 그런 역모에 가담했다고 의심한 선각대사까지 죽인게 아닐까.
■대동방국의 기치를 들었지만…
물론 궁예가 처음부터 그런 사악한 망상가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사졸들과 고락을 함께 했으며, 상벌을 공정하게 했으며, 인사에도 사사로움 없어 백성들이 추앙했다”(<삼국사기> ‘열전·궁예’)는 호평을 들었다. 궁예가 웅지를 펼 무렵 중국 중원은 혼란기였다. 당나라에 망조가 들고 중원은 5대10국시대(907~979년)에 접어들고 있었다. 천년왕국 신라는 망해가는 나라였다.
궁예는 처음에는 “평양 구도(舊都)에 잡초만 무성하니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 선언하고는 국호를 고려라 했다. 고구려 재건의 기치를 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야망은 커진다.
904년엔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911년엔 태봉(泰封)으로 계속 고친다.
‘마진’은 ‘마하진단(摩訶震檀)’의 줄임말. ‘마하’는 범어로 ‘크다’는 뜻이고 ‘진단’은 동방을 말한다. 또 주역에는 ‘태(泰)’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고 했고, ‘봉(封)’은 봉토를 뜻한다.
궁예는 ‘영원한 평화가 깃든 평등 세계’, 즉 대동방국의 기치를 높이 든 것이다. 궁예는 철원(896·구철원 동송)~송악(898)에 이어 905년 다시 철원(풍천원)에 도읍지를 정했다. 철원에만 두번이나 도읍을 정한 것이다.
그 시기 신라 천년왕국이 뿌리째 무너지면서 백성들은 유리걸식하고 있었다.
백성들은 미륵불을 자처하고 나타난 궁예에 홀딱 빠졌다. 어지러운 세상에 출현하여 중생을 구원하는 미륵불이 현신했다니까…. 궁예는 세상을 구원한다는 원대한 포부를 세운 것이다. 907년 무렵 삼한 땅의 3분의 2를 품에 안았다.
■너무 세게 밟은 과속페달
실로 대단한 기세였다. 하지만 너무 과속페달을 밟은 탓일까. 궁예에게 귀부했던 고구려 부흥세력, 즉 왕건을 중심으로 한 송악세력이 반발의 기미를 보인다. 당초 궁예가 구철원에서 송악으로 도읍을 옮긴 이유는 왕건세력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북원(원주)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떨친 양길(생몰년 미상)을 제압하려면 송악 호족들과의 제휴가 필요했던 것이다.
하지만 궁예는 뜻을 이루자 다시 철원으로 복귀했다. 그러면서 청주지역의 1000가구를 철원 땅으로 이주시킨다. 이것은 궁예가 송악세력 말고도 새로운 지지세력을 확보하려는 뜻이었다.
남으로 남으로 세력을 키워간 궁예로서는 ‘고구려 세력’만으로는 천하를 경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궁예를 도왔던 송악세력, 즉 고구려 부흥세력은 불안에 떤다. 게다가 도읍지 건설에 엄청난 공력을 쏟았고, 때마침 흉년이 들면서 민심이 돌아섰다. 승려들도 관심법을 내세워 신하들과 심지어 부인, 아들까지 죽인 궁예를 외면했다.
결국 궁예는 918년 보수 호족들에 의해 축출된다. 그의 최후는 너무도 비참하다.
“도망친 궁예가 굶주림 때문에 보리이삭을 몰래 끓여 먹다가 부양(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세가·태조’)
최근 들어서는 궁예와 관련된 동정론과 긍정적인 시각도 만만치않게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번에 한결 선명해진 선각대사 비문의 내용은 다시 궁예에 불리한 쪽으로 해석된 감이 있다.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이 같아진다’는 태봉국의 초심을 잊지않았다면 어땠을까.
‘불변(不變)의 기록’인 ‘선각대시 비문’을 보며 드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