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헌법에 ‘한국=제1적대국’ 넣고,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은 삭제

2024.01.16 17:13 입력 2024.01.16 19:07 수정

16일 최고인민회의 연설

‘조국통일 3대 원칙’ 삭제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도 철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 “공화국의 부흥발전과 인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한 당면과업에 대하여”를 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1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시정연설 “공화국의 부흥발전과 인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한 당면과업에 대하여”를 했다고 조선중앙TV가 1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TV 화면·연합뉴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기하고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이란 표현을 삭제하겠다고 밝혔다. 남북관계가 악화됐을 때도 존중해왔던 ‘조국통일 3대 원칙’을 허물고, 아예 헌법에 남측을 ‘가장 적대적 국가’로 규정하겠다는 것이다.

16일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전날 평양에서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0차 회의 시정연설에서 “헌법에 대한민국을 철두철미 제1의 적대국으로, 불변의 주적으로 확고히 간주하도록 교육교양사업을 강화한다는 것을 해당 조문에 명기하는 것이 옳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최고인민회의는 남쪽의 국회와 비슷하다.

김 위원장은 “헌법에 있는 ‘북반부’, ‘자주, 평화통일, 민족대단결’이라는 표현들이 이제는 삭제되어야 한다“고 밝혔다.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은 분단 이후 남북 당국이 최초로 통일과 관련해 합의 발표한 7·4 남북공동성명에 명기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이다.

김 위원장은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철거를 지시하고 북한 역사에서 ‘통일’ ‘화해’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를 완전히 제거해버려야 한다고도 했다. ‘조국통일 3대 헌장’은 7·4 남북공동성명(1972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안(1980년), 전민족대단결10대강령(1993년)을 뜻한다. 선대인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통일노선까지 부정한 것이다. ‘경의선의 북측 구간을 회복불가한 수준으로 완전히 끊어놓는 것’도 지시했다.

이날 회의에서 남북회담과 남북교류업무를 담당해온 국가기관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와 민족경제협력국, 금강산국제관광국을 폐지됐다. 당 노동당 기구인 통일전선부는 조만간 열릴 당 중앙위 정치국 회의에서 폐지를 확정할 것으로 보인다. 당분간 남북간 당국 회담이나 경제협력사업, 민간교류를 재개할 의지가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남 위협 수위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에 대해 경고를 이어가며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6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조태형 기자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헌법에 대한민국을 ‘제1적대국’으로 명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등 대남 위협 수위를 다시 한번 끌어올리고 윤석열 대통령도 이에 대해 경고를 이어가며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있는 가운데 16일 경기도 파주 오두산통일전망대를 찾은 관람객들이 전시물을 살펴보고 있다. 조태형 기자

김 위원장은 남북을 적대적 두 국가, 남측을 주적으로 규정하고 “대한민국 초토화” 같은 강경 발언으로 긴장 수위를 연일 높이고 있다. 지난해 말 노동당 전원회의에서는 “남조선 전 영토를 평정하기 위한 대사변 준비에 계속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했고, 지난 8~9일 군수공장을 방문해서는 김 위원장이 직접 “대한민국은 주적”이라고 했다.

김 위원장은 이번 연설에서도 전쟁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는 헌법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평정·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또 “북방한계선(NLL)을 인정하지 않는다”면서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하면 전쟁도발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 9·19 군사합의 파기에 이은 발언으로 NLL 인근에서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높아질 수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이날 국무회의에서 김 위원장의 적대적 두 국가 전환 발언과 관련해 “북한 정권 스스로가 반민족적·반역사적 집단이란 사실을 자인한 것”이라면서 “북한이 도발해 온다면 우리는 이를 몇 배로 응징할 것이다. ‘전쟁이냐 평화냐’ 협박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통일부도 입장문을 통해 두 국가론은 “같은 민족을 핵으로 위협하는 반민족적이고 반역사적인 행태”라고 비판했다.

홍민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김 위원장의) 이번 연설은 한반도 문제를 북·미 문제로 귀속화하기 위해 쐐기를 박는 획기적 내용”으로 “정전 협정에 입각해 남한을 교전국으로 보고 한반도 문제를 북·미 간 문제로 전환하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현 단계에서 북한이 심각한 공격용 재래식 무기 노후화와 극심한 에너지난과 식량난을 겪고 있고 중·러가 힘에 의한 한반도 현상 변경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김 위원장의 준비되고 계획된 전쟁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분석했다. 강경 발언이 이어지고 있지만 일각에서 제기되는 전쟁 도발 가능성은 낮다는 것이다.

오히려 방어적 의도가 강하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김 위원장이 “적들이 건드리지 않는 이상 결코 일방적 전쟁을 결행하지는 않을 것”, “일방적 무력통일을 위한 선제공격 수단이 아니라 자위권에 속하는 정당방어력”이라고 밝힌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홍민 선임연구위원은 “방어적 의도를 내비친 것”이라면서 “연설의 궁극적 목적은 전쟁 가능성 보다는 민족관계 폐기로 한국을 한반도 문제 당사자에서 제거하고 북·미가 온전한 당사라자라는 대미 메시지화”라고 밝혔다. 전쟁 위협 수위를 높임으로써 인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 경제 발전을 위한 역량 동원, 내부 결속을 다지려 한다는 분석에도 힘이 실린다.

임을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김 위원장이 경제와 민생을 희생시키지 않고 군사력과 핵전쟁 억제력을 강화시켜 나가겠다며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면서 “전쟁 분위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려 경제 건설과 민생 개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고강도 내부결속과 자원 집중을 위한 노림수”라고 분석했다.

이날 김 위원장은 인민생활 향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로 지역불균형 극복을 꼽으면서 ‘지방발전 20×10 정책’을 제시했다. 평양에 비해 열악한 환경인 지방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내부 결속을 도모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연설 제목도 ‘공화국의 부흥발전과 인민들의 복리증진을 위한 당면과업에 대해서’로 전체 1만6000여자(띄어쓰기 제외) 분량 중 ‘경제’은 43차례나 등장했고 ‘전쟁’은 23차례, ‘통일’은 13차례 등장했다. ‘일심단결’, ‘전민항전’ 같은 내부 단결을 강조하는 단어도 여러 차례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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