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기자를 만났다. 장애인으로써 불편한 점을 묻는 질문 앞에 나는 늘 했던 대답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죠.” “네.” “불편하죠.” “미래에는…”과 같은 대답들. 장애인 인터뷰이인 나는 늘 사회적 미래를 위해 고백 또는 증언해야 했다. 삶의 어려움과 위태로움을 털어놓건, 사회적 모순을 폭로하건, 시스템과 제도의 문제를 지적하건 나의 극적인 토로들은 늘 미래를 위해 존재했다. 내 증언은 종종 현상을 유지하는 알리바이처럼 쓰였다. 마치 법이나 예산을 조율할 수 있는 일부 특권층만 장애인의 소외를 해소할 수 있다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러다 차별을 해소해야 하는 역할이 차별적으로 주어지는 것 아닐지 걱정되기 시작했다.
복잡한 마음을 안은 채 하루를 보내고 다음날 헬스장으로 향했다. 작년까지 다니던 곳에 비해 불편하고 초라한 헬스장. 몸에 안 맞는 기구, 의자가 없는 탈의실. 바닥에 주저앉아 바지를 벗어야만 할 때 강요되는 ‘장애인다움’과 심리적 불편함. 할 수 있는 운동기구가 몇가지 없어 머무는 시간은 매일 줄었고, 결국 30분 만에 운동을 마치기 일쑤였다. 아무래도 근본적인 시설과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이 열악한 시설에서 마음껏 운동하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의욕을 잃은 채로 설렁설렁 운동하고 있는데, 나를 유심히 지켜보던 새 헬스장 트레이너 선생님이 곁에 와서 물었다. “회원님, 요즘 좀 일찍 가시네요?” “네. 기구가 몸에 안 맞아서 운동을 못하겠어요.” 그에게 자신감 없이 말하고는 얼버무림을 덧붙였다. “선생님 잘못은 아닙니다. 시설과 기구가 문제죠.” 내 옆에 쪼그려 앉은 채 듣던 그는 한참 고민하더니, 기구 때문에 운동을 포기할 필요까지 있겠느냐며 함께 운동법을 찾자고 말하고는 나를 이끌고 헬스장을 다시 둘러보았다. “맨손 크런치는 어떨까요? 아. 근육이 자극될 만큼 자세가 안 나오려나….” 무슨 동작을 하건 아무래도 안 되겠다는 말들이 오갔다. 한참 이 동작 저 동작을 시도한 끝에 ‘와!’ 하는 환호의 순간이 세 번 찾아왔고, 기쁜 마음으로 시계를 보았을 때는 이미 한 시간 넘게 지나 있었다.
탈의실로 가는 길, 그에게 주저하며 물었다. “선생님, 혹시 탈의실에 의자 좀 놓아주실 수 있을까요?” 선생님은 아무래도 필요한 것을 정리해 둬야겠다면서 공책을 들고 와서 메모했다. 당장 바뀐 건 없지만, 그에게 몇 번이고 감사 인사를 하며 헬스장을 나왔다.
올해 새로 찾아간 헬스장은 여러모로 불편한 곳임에 틀림없다. 기구도 몸에 맞지 않고, 공간도 협소하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나는 이곳에서 차별을 인식하지 않는다. 도리어 선생님과 함께 고민하며 절망 아닌 희망을 마주했다. 불완전한 현재를 딛고 함께 오늘을 살아가는 인연을 만났다는 기쁨으로부터 희망이 솟구쳤다.
혁신적인 과학 발전과 개혁적인 제도 개선. 모두 중요한 목표지만, 이 순간 내가 꿈꾸는 건 거창한 변화를 예고하는 미래보다 소박함을 나눌 수 있는 따뜻한 관계다. 오늘도 기꺼이 곁을 내주는 사람들. 당장의 어려움을 미래의 숙제로 미뤄두지 않은 채, 불완전한 현재의 시간을 함께 지키기를 마다하지 않는 이의 마음으로부터 차별 없는 사회의 온기를 느낀다. 완벽한 미래가 아닌 불완전한 현재에서 살아있음을 경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