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형준 MBC 사장
행정법원의 방문진 이사장 교체 브레이크 소식 듣고 ‘좀 더 버틸 수 있겠구나’ 생각
논리도 기준도 없이 과징금 등 제재…방심위·선방위의 징계 7건, 법원서 제동
이종섭 출국금지 보도 법조팀 총동원돼 발굴, 기자들 밤새우며 발로 뛴 성과물
제 방에 고 이용마 기자 초상화…구성원들 모두 그의 유지 깊이 새기고 있어
궁극적 방패는 국민 성원…MBC가 제 역할 다할 때 시청자들이 판단해주실 겁니다
어느 정부보다 자유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 들어 언론 자유가 추락하고 있다. 공영방송 경영진을 바꾸기 위해 방송통신위원회,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을 동원했고, 기자들과 언론사가 압수수색을 당했다. 정부에 비판적인 보도에 무더기 징계를 내리는 언론심의기구는 5공화국 시절 검열기관을 떠올리게 한다. 국경없는기자회의 평가 결과 한국의 2024년 세계 언론자유지수 순위는 62위로 윤석열 정부 취임 2년 만에 19계단 떨어졌다.
이동관 방통위원장 임명과 류희림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 취임 후 양 기관은 협의제 심의기구라는 설립 취지가 무색하게 정권의 민원 해결사처럼 비판 보도에 ‘입틀막’ 제재를 가하고 있다. 22대 국회의원선거방송심의위원회(선방위)는 역대급인 30건의 법정제재를 쏟아냈는데 윤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 정부·여당에 비판적인 시사·보도 프로그램을 집중 겨냥했다. 특히 MBC에 대한 제재는 노골적이어서 중징계인 ‘관계자 징계’ 14건 중 10건이 MBC 프로그램이었다. <뉴스데스크> 일기예보 중 미세먼지 농도 그래픽에 파란색 숫자 1을 사용한 것이 더불어민주당의 ‘기호 1’을 연상케 한다며 국민의힘이 민원을 제기하자 선방위가 신속심의 안건으로 채택해 관계자 징계를 의결했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가방 수수 의혹을 다룬 보도에 한 여당 추천 위원은 “갑자기 방송에서 평범한 가정주부가 청탁 선물을 받았다고 온 국민에게 떠든 꼴”이라는 황당한 논리를 들었다.
‘방심위 폭주’에 MBC는 지금 어떤 입장이고 어떻게 대응하고 있을까. 지난해 2월 임기를 시작한 안형준 사장을 지난 8일 서울 상암동 MBC 사옥에서 만났다. 2시간여 동안 진행된 인터뷰에서 안 사장은 “무더기 벌점 등을 앞세워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어떠한 시도에도 MBC 구성원들은 절대 무릎 꿇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 MBC의 시사·보도 프로그램들이 단골로 법정제재를 받는 이유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MBC가 다른 공영방송처럼 장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지난해 KBS 김의철 사장과 남영진 이사장이 임기 1년여를 남기고 해임됐습니다. 경영과 보도에 문제가 없던 YTN 우장균 사장도 민영화되기 전 사임했고, 라디오 청취율 톱인 TBS의 이강택 사장도 잔여 임기를 얼마 남기지 않고 2022년 중도에 하차했습니다. 그런데 MBC만 경영진을 교체하려다 지난해 실패한 거잖아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방심위 등의 심의를 통해 벌점을 누적시켜서 그걸 가지고 경영진을 갈려는 사전 포석이라고 보는 게 가장 합리적인 거죠.”
- 지난해 9월 법원이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방문진) 권태선 이사장에 대한 해임처분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게 경영진 교체에 제동을 걸었던 거군요.
“사실 행정법원에서 집행정지 결정이라는 브레이크를 걸어주지 않았다면 MBC의 거버넌스도 교체가 됐겠죠. MBC 사장 교체의 첫 단추는 MBC 대주주인 방문진의 이사장을 교체하는 것입니다. 이사장 교체 후 이사 6명 중 2명을 내보내 3 대 6의 열세를 5 대 4의 우위로 바꾼 뒤 사장 해임안을 의결하는 시나리오였죠. 이사장만 교체하면 MBC 사내외 반발이 있더라도 이사 알박기 등 여러 수단으로 밀어붙이려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권 이사장이 버틸 수 있게 되면서 흐름이 바뀐 거거든요.” 안 사장은 지난해 9월11일 회의 중 “이겼다”는 보고를 받고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 행정법원의 결정 소식을 듣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좀 더 버틸 수 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버티지 못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거든요. 2012년 MBC의 6개월 파업이 끝난 뒤 능력 안 되는 이들을 주요 보직에 배치하면서 6~7% 하던 뉴스 시청률이 1%대까지 떨어졌습니다. 소신을 지키는 후배들이 무더기로 부당 전보됐고요. <PD수첩> 한학수 PD가 스케이트장 관리직으로 전보되고 저도 ‘펫 페스티벌’ 하는 곳으로 발령받았습니다. 정신과 치료를 받은 사람들도 아주 많았는데 그런 일들이 또 벌어질 가능성이 높은 거잖아요.”
- 올해 8월12일 방문진 이사장을 비롯해 이사들의 임기가 끝나는데요.
“방문진 이사들의 임기가 끝나면 ‘2차 위기’가 시작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방문진 이사진을 여권 우위로 교체한 뒤 어떤 식으로든 MBC 사장을 해임하려 할 겁니다. 언제까지 특정 정파가 권력을 잡으면 그들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공영방송 사장으로 갖다 꽂아야 하나요. 이런 정치적 후견주의를 막는 방송3법의 국회 통과가 시급합니다. 공영방송이 정치권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 정치인의 나팔수 역할에서 벗어나는 신기원을 만드는 한 해가 됐으면 합니다. 동료 저널리스트들과 양심적 학자와 법조인들이 함께 힘을 합쳐주시길 호소합니다.”
- 취임 후 경영 사정은 어떻습니까.
“지난해 800억~1000억원 적자가 날 거라는 전망이 많았는데 구성원들의 노력으로 기적적으로 흑자를 냈습니다. 올해 1분기에도 좋은 흐름을 이어가면서 흑자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드라마와 예능이 되살아나고 뉴스에 대한 조회수가 늘었습니다. MBC가 드라마에서 오랫동안 좋지 않았거든요. 사실 <옷소매 붉은 끝동> 외에는 두 자릿수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가 없었는데, 지난해 여름부터 <연인> <밤에 피는 꽃> 그리고 <원더풀 월드>까지 모두 10%를 넘었습니다. <수사반장 1958>도 1회부터 시청률이 10%를 넘었고요, 그러다 보니 광고도 많이 판매하고 국내 케이블 채널이나 드라마 채널, 해외 방송사나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등에서 유통 수익이 늘었습니다.”
- 보도 부문은 어떻습니까.
“저희는 저널리즘 원칙에 어긋나는 것은 보도하지 않습니다. 구체적으로 말씀드릴 수 없지만 최근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널리즘 원칙에 입각한 성역 없는 보도라는 기본에 충실합니다. 대통령실 황상무 시민사회수석의 ‘회칼 테러’ 발언 단독보도도 있었지만,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의 호주대사 임명 시 출국금지 상태였다는 뉴스는 법조팀이 총동원돼 공을 들인 발굴 취재였습니다. 호주까지 따라가게 된 것도 밤을 새우다시피하며 발로 뛰는 기자들의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고. 쿠팡이 사실 큰 광고주인데도 불구하고 잠입 취재 등을 통해 블랙리스트 등 여러 문제를 연속 보도했습니다. 그런 노력들이 결국 총선 개표방송에서 성과로 드러났습니다. MBC 개표방송 시청률이 타 방송사의 2배가 넘는 압도적인 1위였고요, 유튜브를 통한 실시간 조회수나 동시 접속자 수는 KBS의 9.5배, SBS의 5.5배였습니다. 총선 다음날 편성국장이 보고하면서 울먹이더군요. ‘16년 만에 KBS 개표방송을 이겼습니다’라면서요.”
- 그런데 방심위는 보도의 공정성 문제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미세먼지 그래픽 숫자 1이 파란색이라는 이유로 제재하는데 어떻게 당해내겠습니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제 오늘 넥타이도 빨간색 계열입니다. 가장 편파적이고 극도로 편향된 사람들이 MBC의 공정성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제가 사장이 되기 전 나온 ‘뉴스타파 인용 보도’ 건도 보면 MBC만큼 윤석열 캠프 쪽의 반론을 많이 실어준 언론이 없었고, 제보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에 대해서도 충실히 짚었거든요. 저널리즘의 원칙을 지킨 보도였음에도 최고 과징금을 때리는 거예요. 논리도 기준도 없어요. 방심위에 가서 대응해야 하는 후배 기자들이 고생 많죠.”
- 제재에 대한 대응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적극적으로 법적 대응을 하고 있습니다. 방심위와 선방위가 기존에 MBC에 내린 징계 7건은 모두 법원에서 집행정지 결정을 받았습니다. 소송 중인 제재 사항은 재허가 판정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법률 검토도 마쳤고요. 앞으로도 잘못된 처분은 법원이 상식적이고 현명한 판단으로 바로잡아줄 것으로 기대하지만, 궁극적인 방패는 국민의 성원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영방송으로서 MBC가 제 역할을 다할 때의 대한민국과 MBC가 정권에 장악된 대한민국 모습에 어떤 차이가 있을지 국민과 시청자들이 판단해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파로부터 독립된, 시청자들에 의해서만 심판받는 공영방송으로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사내 구성원들 분위기는 어떻습니까.
“2012년 6개월 파업한 적이 있는데, 6개월 파업하면 월급은 여덟 달까지 못 받습니다. 그러면 생활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8개월치 월급을 포기하면서 언론 자유와 공정방송, 방송 독립을 위해 애쓴 MBC 구성원들이 전국에 2000명 됩니다. 기자뿐 아니라 드라마·예능 PD, 경영인력, 엔지니어 다 계세요. 형식적인 민주화가 정착됐다는 시기에도 정권의 언론장악 시도는 계속됐지만 MBC 구성원들은 언제나 여기에 맞서온 전통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MBC에도 현 경영진과 다른 정치적 견해를 가진 구성원들이 존재하고 성명이나 사옥 주변 펼침막으로 의견을 표명하지만 대다수 구성원들은 그에 동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제 방에 고 이용마 기자의 초상화가 있습니다. ‘공영방송을 국민의 품으로 돌려야 한다’는 그의 유지를 MBC 구성원들은 가슴에 새기고 있습니다. 공영방송을 장악하려는 어떤 시도에도 MBC 구성원들은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을 겁니다.”
- 유튜브, OTT 등과는 어떻게 경쟁할 계획입니까.
“넷플릭스에서 글로벌 톱을 차지했던 <피지컬 100>은 MBC PD와 회사의 제작 역량이 만들어낸 거예요. 근데 <피지컬 100>이 지상파에서 방송하기에는 다소 자극적이고 노출이 많을 수밖에 없어 OTT용으로 기획을 잡아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 겁니다. 세계 시장을 장악해가는 OTT와 무한경쟁을 벌여야 하는데도 지상파의 팔다리를 묶는 각종 규제가 여전합니다. 그래서 OTT용 콘텐츠를 전문으로 만드는 제작 스튜디오를 자회사로 설립해 곧 운영에 들어갑니다. MBC 오리지널 스튜디오의 약자와 저희 회사 주소를 합성한 ‘MOst(모스트) 267’이라는 이름으로 출범합니다.”
- 미래 발전 전략에 대한 청사진이 있습니까.
“해외 시장 개척이 중요합니다. MBC뿐 아니라 한류나 K콘텐츠의 생존 전략이라고 봅니다. 인도, 중동, 유럽 지역은 K콘텐츠 판매가 활발하지 않습니다. 중동 국가들은 돈이 많으니까 방송사마다 하나씩 OTT를 만들어요. 그러려면 누적된 콘텐츠가 있어야 하잖아요. 거기에 MBC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를 판매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중동, 인도와 인도네시아 등을 중점 겨냥하고 있습니다. 하이브와도 최근 화해하고 공동 기획을 구상 중입니다. 또 지금 인공지능(AI)이 대세잖아요. 사장 직속의 기획본부 내에 ‘AI 트랜스포메이션 기획팀’을 신설했습니다. 그동안 축적된 영상 콘텐츠를 ‘데이터 자본화’해서 AI 기술을 활용해 의료용 프로그램 등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방안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 시청자가 체감할 수 있는 공영방송의 가치를 위해 무엇을 강조하시나요.
“영상매체의 소비 패턴이 TV 패널에서 모바일로 옮겨갔잖아요. OTT가 대세로 자리 잡았지만, 시민들이 OTT에서 민주주의나 사회적 불평등 등의 문제를 시청할 수 있을까요. OTT는 속성상 조회수가 많아야 생존이 가능하잖아요, 그러니까 ‘중요하지만 재미없는’ 주제들은 다루지 않습니다. TV 시청에 별도로 돈을 지불할 수 없는 계층을 위한 ‘보편적 시청권’은 반드시 보장돼야 합니다. MBC는 자본주의 논리와 상관없이 보통의 시민들에게 필요한 정보와 뉴스를 전달하고, 하루의 피로를 씻을 수 있는 예능·드라마 콘텐츠와 스포츠 경기를 마음껏 시청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