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 총선 참패 후 윤석열 대통령 앞에 두 갈래의 길이 있었다. 2년간 왔던 길과 가보지 않은 길이었다. 많은 이들이 전자로 가면 망할 거라고 했고, 후자로 가면 살 수도 있을 거라고 했다. 그 갈림길에 해병대 채 상병 특검법이 놓여 있었다. 윤 대통령은 특검법을 거부했다. 선택은 전자였다. 국민 열에 일곱은 특검을 받으라고 했지만, 가차 없이 배반했다. 잘못된 판단이었다.
어쩌면 예견됐던 일이다. 대선 슬로건 ‘공정과 상식’을 버리고 불통·독선·무도함으로 일관한 ‘윤석열스러운’ 결정이었다. 대통령실은 특검법이 “헌법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법리’를 구구절절 설명했다. 역대 특검 사례에 견줘도 그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건 차치하고도, 국민들은 헌법 정신을 따지자면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헌법 11조)를 떠올린다. ‘특검 거부하는 자가 범인’이라는 단순한 비유에 더 공감한다. 생때같은 젊은 장병의 순직 사건을 대하는 일은 이미 ‘법치’가 아닌 ‘정치’의 영역이었다. 거부권 행사는, “정치하는 대통령이 되겠다”던 윤 대통령의 잘못된 선택이었다.
채 상병 특검법은 오는 28일 국회 재의 표결에 부쳐진다. 윤 대통령은 최종 부결될 걸로 생각할 것이다. 총선 2주 뒤 여당 당선자보다 불출마·낙천·낙선 현역 의원들을 먼저 초대해 오찬을 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왜 보자고 했는지 알지?’였을 것이다. 22대 국회 배지를 달지 못하는 이들에겐 연봉 수억원짜리 공공기관장이 아른거린다. 이미 기관장 임기가 끝났거나 6월 중으로 임기가 끝나는 곳이 90군데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야당은 21대 국회에서 채 상병 특검법이 부결되면, 22대 국회 문이 열리자마자 재발의하겠다고 예고했다. 그때는 ‘김건희 특검법’이 얹어진다. 국정은 특검의 늪에서 허우적댈 게 뻔하다.
윤 대통령의 대비는 ‘인(人)의 장막’을 치는 것이었다. 대통령실에 ‘고향 친구’ 정진석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윤석열 검찰 사단의 막내’ 이원모를 공직기강비서관으로, ‘호위무사’ 이용 의원을 정무1비서관으로 불러들였다. 인적 쇄신이 아니라 정권 말기에나 보던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 ‘민심 청취 강화’라고 우기면서 신설한 민정수석에 검사 출신 김주현을 앉혔다. 직후 김건희 여사 의혹을 수사 중인 검찰 지휘라인을 일거에 교체했다. 공수처가 채 상병 사건 외압 의혹을 수사해 책임자를 법의 심판대에 세우려 해도 기소권은 검찰이 갖는다.
윤 대통령은 버티기에 들어갈 태세다. 어차피 108석 여당으론 법안 하나 뜻대로 만들 수 없다. 손에 쥔 무기는 거부권이다. 거대 야당도 거부권 앞에선 속수무책일 거라고 여긴다. 그러니 ‘우린 이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는 여당 의원들에게 ‘쫄지 말고 당당하게’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여전히 “국정 방향은 옳다”며 야당의 반대를 ‘정권퇴진 운동’이나 일삼는 ‘반개혁 세력’으로 몰아붙일 참이다.
버티기도 힘이 있어야 한다. 그 힘은 지지율에서 나온다. 대통령 지지율이 30% 아래면 정상적인 국정운영이 안 된다. 총선 한 달 뒤 국정 지지율은 24%(5월10일 발표·한국갤럽 기준)다. 대선 득표율(48.6%)의 절반이다. 남아 있는 중도는 없고, 보수 지지층조차 다수 떨어져 나갔다. 지지율이 10%대로 들어가면 국정 마비 상태에 빠진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다. 야당에선 ‘탄핵’을 거론하는 빈도가 잦아지고 있다.
여당 의원들은 똘똘 뭉쳐 지켜줄 거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4년 임기를 시작할 의원들의 우선순위는 3년 뒤 떠날 윤 대통령의 심기가 아니다. 2026년 지방선거, 이듬해 정권 재창출이 중요하다. 역대 정권에선 차기 대권주자들이 그래도 3년차 현재권력의 눈치를 봤지만, 지금은 다르다. 민심이 등 돌린 윤 대통령과 기를 쓰고 차별화를 시도할 공산이 크다. 그래야 존재감을 발산하고 기회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밖에서 공격하고, 안에서 흔들어대면 윤 대통령이 버틸 재간이 없다. ‘정치 9단’ 김영삼·김대중조차 임기 말이 버거웠는데 ‘정치 초보’ 윤 대통령이 감당할 수 있을까. 윤 대통령이 말은 하질 못해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떨고 있을 것이다. 겉으론 웃어도, 웃는 게 아닐 게다.
시간은 윤 대통령 편이 아니다. 민심을 흐르는 물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여소야대라는 힘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윤석열스럽지 않은’ 현명한 선택이 늦어지면, 그때는 소용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