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화된 ‘찐따’ 담론…배제되는 여성·퀴어
유튜브 피식대학의 ‘너드학개론’
‘자칭 찐따’ 유튜버들 경험담 인기
여성은 ‘고백 공격’의 피해자거나
찐따남 멸시하는 가해자로만 존재
여성·퀴어 찐따는 인식조차 안 돼
또 다른 차원의 심연이 있다는 사실
영화나 웹툰으로라도 들여다보길
‘피식대학’은 코미디언 이용주, 김민수, 정재형이 주축인 코미디 유튜브 채널이다. 최근 경상도 지역을 탐방하는 콘텐츠 <메인드 인 경상도>에서 경북 영양군을 방문했다가 지역 비하 발언 및 언행으로 비판받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코미디는 기존의 격과 맞지 않으며, 선을 넘는 웃음을 실험하기에 불편을 유발할 수도 있다는 입장을 취한다. 위반과 전복은 기존의 사회 체계와 규범, 즉 권력과 관습의 폭력성을 거스르고 질서에 균열을 낼 때 발생한다. 그러나 서울과 지방의 역학 관계를 그대로 차용하며 비서울 지역을 뒤떨어진 것, 열등한 것으로 조롱하는 행위는 선을 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기존의 권력 체계, 즉 ‘선’을 공고히 할 뿐이다. ‘피식대학’을 키운 초기 아이템 <탈북자 몰카>의 웃음이 편견과 우월 의식에 기반하듯 말이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주류에 반하는, 정확히는 ‘메이저가 품을 수 없는 통찰과 감성을 지닌 별난’ 존재로 정체화하는 태도는, 당사자의 정신 건강에는 이롭겠지만, 캐릭터 해석 측면에서는 틀렸다. 그럼에도 자신들이 주변부의 존재라고 느끼는 이유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에서 이탈한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정재형은 ‘너드(Nerd)’나 ‘찐따’를 자칭하고, 이용주는 남성적 특질이 부족한 자신의 신체를 “나는 남자도 여자도 아닌 것 같다”며 자조한다. 이렇게 부족한 남성성을 내세우는 방식은 역설적으로 남성 간 연대인 호모소셜(Homosocial, 동성사회성)을 강화하고 소외와 아픔을 남성만의 것으로 전유하는 효과를 낳는다. 이러한 감성은 피식대학이 올린 영상 <너드학개론>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한 달 전, 피식대학은 <너드학개론>이라는 영상을 업로드했다. 정재형이 강의하는 콘셉트의 영상은 ‘찐따’와 ‘너드’를 구별하며 시작한다. 찐따의 조건은 무엇이고, 누가 너드인가? 정재형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자격지심-자존감-눈치’이다. 해당 영상에 곽튜브가 인정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면서 2탄 <찐따가 사랑할 때>가 만들어졌다. 영상에 출연한 곽튜브와 빠니보틀은 지상파에도 자주 출연할 만큼 성공한 여행 유튜버이자, ‘찐따 셀링’한다는 말을 들을 만큼 찐따계의 아이코닉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외모가 매력적이지 않고, 성격 역시 호감을 사기 어려워 연애 시장에서 ‘안 팔리는’ 존재임을 인정하며 자조 개그 소재로 써먹는다. 곽튜브는 또한 학교폭력 피해 경험과 그로 인해 자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를 고백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곽튜브가 과거의 아픔을 딛고 꾸준히 노력해서 대사관에 취직하거나 여행 유튜브로 성공한 사연에 대중들은 공감하고 감동한다. 이러한 ‘찐따의 성공 서사’는 사람들과 잘 어울리고 인기 많은 ‘인싸’만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여겼던 감수성에 신선함을 불어넣고, 소위 ‘인싸’라고 하는 집단의 문화가 사실은 약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으로 구성될 수 있음을 폭로하기도 한다. 동시에 그가 ‘지금은’ 성공한 유튜버이기에, 그에게 내재된 ‘찐따성’을 마음 편하게 희화화하고 조롱할 수 있다는 안전한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그런 감상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하는 것은 곽튜브처럼 성공하지 못한 현실의 찐따들이다.
이렇게 여러 차원에서 활발하게 호명되는 잘나가는 찐따, 진격하는 찐따는 의심할 나위 없이 남자―그것도 이성애자, 유성애자의―의 얼굴을 하고 있다. 시대가 청년을 ‘된장국 끓여주는 아내와 토끼 같은 자식이 있는 따뜻한 가정을 갖지 못한’ 존재로 표상할 때, 자연스럽게 여성이 누락되듯 말이다. <너드학개론>에서 정재형은 자신의 약력을 소개하며 “남중 남고 공대 군대” 나왔고, “어디 가서 못생겼단 소리 한 번도 안 들어본 적 없고”, “고백으로 여자 울려본 적 있다”라고 말한다. 2탄 <찐따가 사랑할 때>에는 찐따가 여성을 짝사랑하고, 혼자 착각해서 ‘고백 공격’을 하고, 분노에 차는 단계를 설명한다. 타인과의 상호작용이 없는 나르시시즘적이고 망상적인 연애를 지적한다는 점에서 약간의 희망이 보이지만, 어쨌든 찐따는 이성애자 남성으로만 가시화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찐따력의 중요한 측정 조건인 ‘성적 경험’ 여부는 우에노 지즈코의 지적처럼 정상성과 남성성을 구성하고, 남성 사회에서의 지위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였다. 그래서 곽튜브와 빠니보틀이 출연한 피식쇼의 제목이 <빠니보틀, 곽튜브에게 키스할 때 올바른 손의 위치를 묻다>인 것이다. 성적으로 어필하지 못하는 찐따는 연민과 동정의 대상으로 수용된다. 이러한 도식에서 여성은 찐따의 고백 공격을 받고 눈물로 보호막을 치는 ‘피해자’거나, 찐따를 멸시하는 ‘정서적 가해자’(혹은 돈 많고 잘생긴 남자만 좋아하는 김치녀)거나, 그런 찐따에게 은혜를 베푸는 ‘성녀’ 정도로 인식된다. 영화 <위대한 소원>에서 불치병에 걸린 친구와 한 번만 자달라고 부탁하는 찐따들의 우정이 애틋한 코미디가 될 때, 이들에게 따귀를 날리는 여성은 성적 주도권을 휘두르는 강자로 연출된다.
익숙한 냄새를 맡았을 것이다. 지금의 찐따 담론은 고개 숙인 남자-가정에서 설 자리가 없는 아버지(아빠 힘내세요)-루저와 잉여 계보의 변주이다. 사회는 언제나 남성성의 훼손과 추락을 걱정하여 약한 남성들을 응원하고 북돋아줄 방법을 찾았고, 2000년대 이후 그 전략이 남성 주체의 자조와 자학으로 바뀌었다. 이상적 남성상에 부합하지 못하는 ‘약하고 흠결 있는 남성’들이 상대적 약자를 공동의 적으로 설정하여 남성 간의 연대를 강화하고, 훼손된 남성성을 보상받는 방식은 <웃찾사>(SBS)의 ‘남자끼리’, <개그콘서트>(KBS)의 ‘남성인권보장위원회’ 코너, <무한도전>(tvN)이나 <수컷의 방을 사수하라>(XTM) 같은 프로그램에서도 일관되게 확인할 수 있다. 중식이 밴드가 ‘야동을 보다가’라는 노래에서 불법 촬영물에 등장한 전 여자친구를 보면서 자신의 초라한 현실을 위로할 때, 피해자인 여성의 고통보다 불법 촬영물을 보며 성욕을 달래야 하는 루저-찐따 남성의 애환이 더 강조된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반면 비남성 찐따, 즉 성적 매력 어필의 대상이 여성이 아닌 퀴어 찐따나 여성 찐따는 아예 인지조차 안 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소위 ‘사회성’과 매력이 찐따를 가르는 기준이라면, 남성과 여성에게 부과되는 사회성과 매력의 기준과 속성이 다르기에, 여자 찐따에게는 남자 찐따의 문법으로 해석할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여성 찐따는 여자들에게서도 환영받지 못한다는 점에서 여성 연대라는 만능양념장도 소용없다. 자신의 못나고 부족한 점을 드러냈을 때 수용받고 이해받을 수 있는 것 또한 특권이라면, 지금의 찐따 담론조차 무시하는 못생기고 성격 나쁜 여성 찐따는 투명인간이다.
여성 찐따 하면 호출되는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2008)도 벌써 15년 전 작품이다. 전혀 사랑스럽지 않고, 억지를 부리며, 성적으로 욕망당하고 싶어하지만 잘 안 돼서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끝까지 ‘안면홍조증을 치료하고 환골탈태하거나 자기와 수준이 걸맞은 남자 짝꿍과 나름의 연애를 하’지도 않는 양미숙(공효진)의 캐릭터는 매우 파격적이고 낯설었다. 이 황무지의 계보를 간신히 잇는 작품이 바로 들개이빨 작가의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카카오 페이지)이다. 주인공 들빨개빨(유유령)은 웹툰 작가로,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에 콤플렉스가 있는 데다 성격마저 음침하다. 1화 제목부터가 ‘강한 암컷’인데, 강한 암컷을 선망하는 ‘찐따 암컷’의 스토리이다. 착한 게 유일한 장점인 남자친구와 10년째 평범한 연애를 이어오던 들빨개빨은 어느날 ‘★’이라는 뮤지션의 음악에 빠져서 열성팬이 된다. 집요한 추적 끝에 가까워진 ★은 아름답고, 페미니스트이며, 비건인 뮤지션이다. 자신이 이성애자인 줄만 알았던 들빨개빨은 ★을 사랑하게 되면서 퀴어로 정체화한다. 이때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여성 서사’는 남성적 시선에 갇혀 있던 들빨개빨이, 여성과의 사랑을 통해서 새로운 차원으로 넘어가고 이전의 억압과 결별하여 자유롭게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전개이다. 하지만 한평생 자기 대상화, 외모 지상주의, 자기 검열로 돌돌 굴려지며 성장한 여자 찐따의 행복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미학적으로 아름답고 윤리적으로 우월한 ★을 사랑할수록 들빨개빨은 끝없는 자기 혐오와 열등감에 시달린다. <부르다가 내가 죽을 여자 뮤지션>은 GL(Girl’s Love) 장르인데 독자들은 ‘못생긴 주인공의 러브 스토리’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편집자의 조언이나,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인지하지 못한 거식증에 걸려 무섭게 살이 빠지는 들빨개빨의 모습은 작가와 주인공을 동일시하게 하는 설정과 맞물려 어마어마한 흡입력을 발휘한다. 젠더화된 찐따 담론에 한 번쯤 의문을 가져봤다면, 들빨개빨의 사랑 이야기를 한 번 찍어먹어 보기를 권한다.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서도 받아들여지지 못한 ‘진짜’의 심연이,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