숭배와 멸시 양극단만 존재…그러나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
서로 충돌하는 정보를 내세우며 말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누가 옳은지 그른지 판별이 나야 끝난다. 하지만 어떻게? 오랫동안 이러한 상황을 마무리했던 대사가 있다. “어제 TV에서 봤어!” (현실감을 좀 더 살리자면 “‘테레비’에서 봤어!”) 물론, 텔레비전이 가장 권위 있는 미디어이자 정보의 채널로 신뢰받던 시절의 이야기다. ‘치트키(Cheat Key)’ ‘치트 코드(Cheat Code)’는 비디오 게임 진행이 불가능할 때 일종의 속임수로 사용하는 방법 또는 게임 엔딩을 쉽게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명령어를 일컫는다. 더는 하나의 매체가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 뉴미디어 시대지만, 모든 논쟁을 종결하는 치트키는 여전히 존재한다. “○○○가 그랬어!” 이제 이 자리에 들어가는 것은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가장 유명한 사람의 이름이다. 이들의 의견이 곧 진실이며 가장 강력한 보증서이다. ○○○의 흥망성쇠는 당대의 수요와 욕망을 반영하며 시대를 풍미한다. 4대천왕이라 할 수 있는 오은영, 백종원, 강형욱, 설민석은 ‘전문가테이너’라고도 불리며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이 중 설민석이 전문성 문제로 신뢰를 잃으며 낙오한 후, 최근에는 강형욱이 논란의 중심이다. 강형욱은 개 훈련사로 <세상에 나쁜 개는 없다>(EBS), <개는 훌륭하다>(KBS) 등의 프로그램에 출연하며 명성을 얻은 인물이다. “강형욱의 ‘강’은 강아지의 ‘강’” ‘개통령’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이코닉한 존재였지만, 그가 운영했던 회사 직원들이 ‘갑질’을 폭로하고 본업인 개 훈련에서 종 차별 의혹이 불거졌다. 논점이 빗나간 강형욱의 해명 방송은 이상했고, 전 직원들은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아니 근데…?! 강형욱 사태에서 진실 여부를 둘러싼 관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유명인이 소비되는 방식, 정확히는 ‘띄우고’ ‘끌어내리는’ 과정과 이에 대한 성찰이다.
“OOO이 그랬어!”로 논쟁 끝낼
‘반박불가’ 전문가 향한 맹신은
정보가 ‘너무’ 많은 사회에서
권위에 기대면 편안하기 때문
전지전능 ‘구세주’로 숭배받다
폭로로 한 순간에 인생 ‘나락’
완벽·결함 섞인 복잡한 타인을
단편적 시선 벗어나 바라봐야
반려견을 키우는 처지에서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2010년 전후까지 반려견 훈육의 핵심 중 하나는 ‘개에게 주인과의 서열을 확실히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반려동물은 ‘애완’으로 더 많이 불렸고 이들에게 쏟는 인간의 노력과 애정은 ‘유난’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강형욱의 출현은 반려동물 가구가 급증한 시기의 수요와 잘 맞아떨어졌고, 산책과 교감을 강조하는 훈련 방식은 반려동물에 대한 인식과 감수성의 변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강형욱은 큰 인기를 끌었고, 방송계에 성공적으로 자리 잡았다. 강형욱의 훈련 방법은 널리 퍼지며 진리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방송의 포맷과 연출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시청자를 매혹하기 위해 전문가의 능력은 극적인 서사로 제시된다. 먼저 문제 행동을 하는 개를 보여주고, 전문가가 개입한다. 그는 문제의 원인을 빠른 시간 안에 ‘예리한 눈으로’ 파악하고 해결책을 내놓는다. 의뢰인 견주는 이를 충실히 따른다. 이후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방송이 마무리된다. ‘비포’와 ‘애프터’가 대조되는 상황에서 전문가의 위치는 구세주와 비슷하게 격상된다. 만약 개의 행동이 개선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킨 대로 하지 않은 견주의 잘못이다. 전문가가 잘못 판단했을 가능성이나 개 또는 견주의 특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전지전능해 보이는 대상에게 팬덤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전개이다. 이때부터 순환 구조가 형성된다. 특정 인물이 맹신과 숭배의 대상이 되면, 이견이나 문제 제기는 무시당하거나 공격받는다. 능력에 대한 간증이나 호의적 반응만을 허용하는 분위기는 한 분야의 전문가에 불과한 인간을 신성불가침의 영역에 올려놓는다. 왜, 이렇게 숭배와 옹호의 근두운 덕분에 진실과 윤리적 책임을 피해 훨훨 날았던 인물이 있지 않은가. 황우석이라고.
비슷한 포맷의 생산과 유통은 오은영의 진단과 처방을 ‘은영 매직’이라고 부르는 <금쪽같은 내 새끼>(채널A)를 포함하여, <오은영의 금쪽 상담소>(채널A),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MBC) 등에도 적용된다. 2006년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SBS)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오은영은 의학 박사로, 정서와 소통의 가치를 등한시하고 정신질환이나 심리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 열악했던 한국 사회에서 입지전적 인물이다. 대부분 한 회분으로 구성된 방송 안에서, 그 어떤 문제 행동을 보이는 아동과 양육자라도 ‘반드시’ 개선의 희망을 보이며 끝난다. <백종원의 골목식당>(SBS)에서는 성공한 요식업계 사업가이자 미식의 아이콘인 백종원 대표가 식당을 방문해서 문제 상황을 찾아내고 해결책을 제시한다. 백종원의 솔루션에 따르지 않는 사장은 고집불통이거나 예의가 없는 ‘빌런’으로 비난받았고, 달라진 식당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방송은 끝난다. 아무리 뛰어난 전문가라도 신이 아닌 이상, 100% 성공할 수는 없다.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곳은 다양한 변수가 존재한다. 단기간의 해결책이 누적된 문제나 사고방식을 쉽게 변화시키지 못할 수도 있고, 시간이나 개인의 기질이 차이를 만들 수 있으며, 이러한 변수가 전문가의 전문성과 반드시 충돌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시청자가 보고 싶어 하는 것, 그리고 방송용으로 쓸 만한 것은 전문가의 개입으로 문제가 해결된 매끄럽고 감동적인 서사다. 그렇게 가공되고 편집된 정보는 말한다. “○○○는 언제나 옳다”라고.
다수가 자유로운 의견 교환을 통해 지식을 만들어가는 집단지성이 대세인 네트워크 사회라는데, 왜 이렇게 전문가의 권위를 원할까? 정보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정보의 바다에서 옳은 정보를 판별하고 취사선택하려면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렇게 취득한 정보가 오염돼 있을 가능성, 누구든지 검색을 통해서 즉각 ‘나’의 오류를 간파할 수 있다는 사실은 불안을 자극한다. 이때 ‘반박 불가’의 권위를 가진 전문가는 믿을 만한 지식의 큐레이터다. “○○○가 그랬어.” 이 한마디면 내가 틀릴 수 있다는 불안은 가라앉고 정보의 진실 여부를 증명할 필요가 없다. 편안하고 안락하다. 이는 결국 ‘내가 믿는 사람’이 ‘반박 불가’의 완전무결한 존재이기를 바라는 욕망으로 통한다. 그 사람이 완전무결한 사람이라서 믿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기 때문에 완전무결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유명인은 숭배와 멸시라는 양극단에서만 존재한다. 존재할 수 있다. 유명인에 대한 태도는 숭배할 수 없어지는 순간 곧장 멸시로 건너뛴다. 누군가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고 신뢰를 ‘적절히’ 조율하는 중간 단계가 있어야 하는데, ‘나락 간다’라는 말처럼 그저 추락하고 곤두박질치는 전개뿐이다. 강형욱이 과거 운영했던 사업체에서 직원들에게 갑질을 했다는 폭로가 터지자, 그제야 그가 개 훈련에서도 ‘완벽하지 않은’ 인간으로서 문제가 있었고 그로 인해 피해를 봤다는 말이 주목받았다. 개 훈련사로서 강형욱에 대한 비판은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그가 개통령으로 불릴 때는 묻혔던 목소리다. 위계가 있을 때, 폭로라는 극단적 형태로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은 소통이 불가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숭배와 멸시라는 위태로운 시소게임은 전문가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또 객관적으로 입증할 만한 잘못만으로 구성되지도 않는다. 숭배와 멸시와 비슷한 관계에, 유명인에 대한 ‘미담’과 ‘폭로’가 있다. 유명인과 만났거나 일했던 경험은 그가 얼마나 좋은/나쁜 감정을 선사했는지에 따라 ‘인성’이라는 키워드와 결합하여 미담과 폭로로 양극화된다. 그리고 온라인 환경은 이를 엄청나게 증폭시킨다. 누구나 미담 몇개로 숭배의 전당에 오를 수 있다. 동시에, 누구나 폭로 글 몇개로 멸시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다. 미담은 말 그대로 대상에 대한 칭찬이지만,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할 뿐 아니라 행동을 규제하고 통제하기도 한다. 게다가 미담의 기준은 아주 주관적이다. 그런데도 누군가의 미담이 쌓이면 쌓일수록 ‘나와’ 만났을 때도 좋은 경험을 선사하리라는 기대가 강화된다. 상대가 충족할 의무가 없는 기대를 충족해주지 않으면, 이 감정은 쉽게 실망과 나쁜 감정으로 뒤집힐 수 있다. 미담과 폭로는 종이 한 장 차이의, 어쩌면 양면지에 발린 꿀과 독이다. 하지만 한 인간을 단편적으로 경험하는 순간은 실제로, 미담과 폭로라는 명백한 극단보다는 애매하고 무감한 중간 지점 어딘가에 훨씬 가까울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선과 악, 무능과 유능, 완벽과 결함의 복잡한 스펙트럼 속에서 미묘하고도 극적인 항해를 한다. 숭배하거나 멸시하는 것 외에도, 타인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좀 더 산뜻하고 다양한 태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