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을 받아들이기

2024.06.19 20:39 입력 2024.06.19 20:40 수정

폭염주의보가 발령되었으니 진짜 여름이 시작된 것일까. 주변에 여름을 사랑하는 친구들이 많은 가운데 나는 예전부터 어쩐지 그러지를 못했다. 여름은 상쾌하고 시원하고 생기 있는 계절이지만 동시에 무덥고 끈적이고 지치는 계절이니까. 아니, 그보다 모든 것이 빨리 상하고 쉽게 썩고 금방 사라지는 계절이니까. 겨울에 모든 것이 얼어붙고 잠들어 시간이 고요하고 느리게 흐른다면 여름은 그 반대라고 생각했다. 많은 것이 태어나고 자라지만 그만큼 많은 것이 시들고 죽는다고. 금세 지는 꽃잎이나 맥없이 죽는 벌레를 볼 때마다 이렇게나 많은 생명이 요란하게 태어났다가 빠르게 사라지는 계절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몇년 전부터 여름 초입마다 안희연의 이 시구를 떠올리곤 했던 것 같다. “여름은 폐허를 번복하는 일에 골몰하였다.”(‘면벽의 유령’) 이 시가 실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창비, 2020)에서 여름이란 계절은 차라리 여러 생명이 무너져내린 쓸쓸한 장소에 가까워 보였다. 식물들이 맹렬히 자라나고 벌레들이 왕성하게 번식하는 와중에 짧은 생애 주기를 가진 이들이 스러지는 모습을 자꾸만 목격하게 되니까. 그러나 여름 언덕에서 부는 신선한 바람까지 담고 있는 이 시집은 동시에 이렇게도 말한다. “언제나 폐허가 되어야만 거기 집이 있었음을 알았다.”(‘캐치볼’) 그러니까 여름은 우리에게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 생명과 죽음이 번복되는 이 슬픈 계절이야말로 우리가 사는 삶과 가장 가깝다고.

그래서 나는 얼마 전 출간된 안희연의 새 시집 <당근밭 걷기>(문학동네, 2024)의 표제에 저번처럼 여름이라는 단어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집 곳곳에 여름이라는 계절이 어떻게 스며 있는지 궁금했고, 이 아름다운 시를 오래 읽었다. “꿈에서 깨어나도 여름. 깊은 물속에 나를 두고 와도 여름. 잠시만 딴생각에 잠겨도 모래벌판에 도착해 있고//(…)// 오직 견딜 것./ 그것이 이곳의 룰.”(‘터트리기’) 이 시의 화자는 슬픈 기억을 잊기 위해서 수십 명으로 쪼개져서 야구공, 돌, 신발, 못 등 온갖 물건을 쉴 새 없이 던진다. 그러나 한바탕 난장을 벌인다고 해도 슬픈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반복되는 꿈처럼. 여름도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금세 시들고 상하고 썩게 만드는 계절. 그래서 쉴 새 없이 어떤 노력을 한들 소용이 없는 계절. 그래서 보내기 위해서는 견디는 법밖에는 없는 계절.

그런데 여름을 어떻게 견디지? “여름아, 반찬이 쉽게 상하는 계절이 되었어// 이런 계절이 되어서야/ 겨우 답장을 한다//(…)//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 내가 사랑하는 부사들을 연달아 적으며/ 그것들의 겨움을 또한 생각한다.”(‘야광운’) 아마도 힘든 시간을 보낸 듯한 이 시의 화자가 여름이 되어서야 겨우 답장을 적을 수 있었던 까닭은 아이러니하게도 여름은 모든 것이 쉽게 상하는 계절이기 때문이다. 시들고 상한 것이 나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공공연해지니까. 그런데 시에서 방점이 찍히는 것은 ‘겨우’라는 부사다. “절대로, 도무지, 결단코, 기어이, 마침내, 결국”이 강하고 질긴 부사라면 “겨우, 기껏, 고작, 간신히, 가까스로”는 연약하고 애처로운 부사다. 새롭게 도약하거나 생동하기보다는 영원히 제자리에서 맴돌 것만 같은. 시는 이 부사들이 여름과 닮아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수많은 생명이 피어났다가 시들고 자라났다가 상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견디는 일. 그것이 슬픔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다면 나는 여름을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이 여름의 룰이라면 말이다.

인아영 문학평론가

인아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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