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에 발간된 시집 <천국어 사전>(타이피스트, 2024)의 추천사를 썼다. 저자인 조성래 시인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채로, 시집 파일을 넘겨받았다. 어느 봄날, 나는 지하철을 기다리며 종이에 인쇄된 그의 시편들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의 고향이기도 한 ‘창원’이 제목인 시가 눈에 띄었다.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창원으로 갔다// 이제 두 달도 더 못 산다는 어머니/ 연명 치료 거부 신청서에 서명하러 갔다.”
시에는 ‘어머니’가 누워 계신 병원의 구체적인 이름도 등장하는데, 그곳은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병원이었다. 엄마가 종종 내게 들려주었던 환한 이야기의 배경, 거기서 화자의 어머니는 “자기가 죽을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울다가 또 잠시 뒤에는 “자기가 죽을 것을 까맣게 모르는 사람처럼” 웃어 보인다. 죽어갈 어머니와 그의 예견된 죽음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사람, 축복처럼 불어든 생에 놀라 울음을 터뜨렸을 사람과 나를 낳고 기진한 엄마가 한 공간에 어우러져 있는 듯했다. 슬프고도 기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그렇게 생각해 버려도 되나 싶어서 죄스러웠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타야 할 지하철 몇 대를 그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홀로 죽을 것이며/ 나는 여전히 어떤 현실들에 마비된 채// 살아도 되는 사람처럼” 살아갈 것이라는 문장으로 시는 끝이 난다. 살아도 되는 사람같이 산다는 말에는 자신을 살아선 안 되는 사람이라 여기는 마음이 서려 있다. 화자는 막을 수 없을 어머니의 죽음을 조금 더 늦추지 못했다는 이유로 깊은 죄책감을 느낀다.
‘죄책감’의 사전적 정의는 ‘자기 잘못에 대하여 책임을 느끼는 마음’이다. 꾸짖을 책(責)이 쓰인다는 점에서 자신의 죄를 책망하는 마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는 예견된 타자의 죽음 앞에서 자기를 마구 꾸짖는다. 기도문처럼 반성을 왼다. 살아 있다는 것을 죄로 여기는 사람같이 군다. 나 또한 누군가 쓸쓸히 죽어갔고 죽어갈 공간에서 삶을 얻었다는 데 영문 모를 죄책감을 느꼈다. 텅 빈 역사에 앉아, 마주했던 죽음들과 내가 영영 알지 못하는 죽음들을 가만가만 헤아려 보았다.
“사람이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조차 폭력이라고 예민하게 감지하는 시인은 시집 전반에서 계속 속죄한다. 자신의 죄를 사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게 아니다. 그것은 타자의 죽음에 무뎌지지 않기 위해 자기 죄를 재각인하는 분투에 가깝다. 프로이트는 건강한 애도란 대상의 상실과 그로 인한 상처를 인정하고 그에게 쏟았던 사랑의 에너지를 회수하여 다른 객체로 옮기는 일이라고 한다. 그가 보기에 조성래 시집의 ‘나’들은 대상의 부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기를 탓하다 결국 자신마저 잃어가는 다소 부정적인 주체일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처절한 죄책감이 지나치게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거듭 자책하면서 슬픔에 빠져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이들이 온전히 이해된다. 정상적인 애도의 절차가 도리어 허울 좋은 허상 같기도 하다.
죽음을 추체험하는 일밖에 할 수 없는 우리가 타인의 죽음을 떠메고 살 수 있을까? 차도하 시인은 시집 <미래의 손>(봄날의책, 2024)에서 이렇게 말한다. 죽은 친구를 둔 “두 사람이/ 한 사람씩의 영혼을 더 업고 있었다 해도 (…) 시공간은 그들을 잘 소화해 낼 수 있다”.(‘기억하지 않을 만한 지나침’) 어깨에 매달린 영혼을 쫓아버리지 않아도, 죽은 이에 대한 애도를 서둘러 완수하려고 들지 않더라도 세계는 이를 수용할 수 있다는 말에 다정이 깃들어 있다.
사랑했던 혹은 미워했던 사람들의 죽음을 둘러업고서 그들의 삶을 때때로 잊고 또 수시로 기억하면서 저마다의 걸음을 옮기는 일, 그것이 살아가는 일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