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범’을 파괴하는 ‘사실’의 힘

2024.07.09 20:30 입력 2024.07.09 20:37 수정

[이진우의 거리두기]‘규범’을 파괴하는 ‘사실’의 힘

도덕은 실종되고 적나라한 현실만이 지배한다. 인간이 행동하거나 판단할 때 마땅히 따르고 지켜야 할 기준과 도리를 통상 규범이라고 한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온갖 종류의 갈등을 겪지만 그래도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는 합의가 오랫동안 존재했었다. 사람들이 종종 ‘양심’ 또는 ‘상식’이라 부르는 행동 기준은 설령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과 다를지라도 우리가 따라야 할 이상과 당위로 여겨졌다. 당위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이상주의자’가 되고 사실을 중시하면 ‘현실주의자’가 되기도 하지만, 사실과 당위 사이에는 일종의 생산적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현실을 무시한 당위는 공허하게 들리고, 당위를 배제한 현실은 맹목적이기 때문이다. 이상은 우리가 현실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관점을 제시하면서 동시에 구체적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할 힘을 발견해야 한다. 도덕과 규범이 사라졌다는 것은 우리가 현실의 사실적 힘에 완전히 예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범 사라진 자리엔 힘의 논리만

마땅히 그렇게 하거나 되어야 하는 ‘당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구체적 현실 속에서 우리가 실제로 경험하는 ‘사실’이 규범이 된다. 현실은 이제 도덕적 이상을 위해 개혁해야 할 대상이 아니다. 현실 자체가 우리의 삶과 행동을 지배하는 규범이 된다. 16세기 지독한 정치적 혼란을 겪었던 마키아벨리는 새로운 정치질서를 정립하려면 현실주의자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는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와는 너무나 달라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것을 행하지 않고,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보다는 잃기가 십상이다.” 마키아벨리는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만 따르면 실패한다는 경고에 그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생존을 위해서는 부도덕한 행위가 필연적이라고 주장한다. 군주는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규범이 현실의 사실적 힘에 잡아먹히는 순간이다.

당위와 규범과 이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힘의 논리만 지배한다. 현실의 적나라한 민낯이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으면, 우리는 상식과 법치라는 위선적인 화장을 지우고 맨얼굴을 보면 된다. 우리 사회의 민낯이 드러난 세 가지 현상을 보자. 첫째는 10여년 동안 우리 정치를 지배해온 두 진영의 정면충돌이다. 22대 국회도 정말 어렵게 개원하였다. 여당인 국민의힘은 야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관례를 어기고 국회의장과 운영·법사위원장을 독식했다고 비판하면서 원구성에 진지하게 임하지 않았고, 민주당은 단독으로 상임위원장 선출을 표결 처리했다. 한쪽은 선거 결과로 나타난 민심과 민의를 그리고 다른 쪽은 관례를 강조하지만, 핵심은 다수결이라는 힘의 논리를 따르라는 것이다. 22대 총선에서도 거의 국민의 절반인 45%가 국민의힘을 뽑았다는 점은 중요하지 않다. 승자독식의 소선거구제 덕택으로 두 정당이 가져간 지역구 의석수 차이가 무려 71석이나 되는 현실이 막강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 사회의 두 번째 민낯은 지루하게 이어지는 의·정 갈등이다. 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으로 시작한 의료 갈등은 대한의사협회의 총파업 선언으로 정점에 도달했다. 정부도 휴진하는 의료기관에 진료 명령을 내리는 ‘강 대 강’ 대치는 계속되고 있다. 임현택 의협 회장의 거칠고 강한 수사는 무엇이 문제인지를 잘 드러낸다. “우리가 왜 의료 노예처럼 명령에 따라야 하냐”는 말은 의료의 공공성과 그에 따른 윤리적 책임성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한다. 업무상과실치사 혐의로 기소된 의사에게 유죄 선고를 한 판사에게 “이 여자 제정신입니까?”라고 막말하면서 “이 여자와 가족이 병원에 올 때 병 종류에 무관하게 의사 양심이 아니라 반드시 심사규정에 맞게 치료해주시기 바란다”고 겁박한다. 이런 말이 과연 의료계를 대변하는 사람에게 적합한지는 이미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약 그가 정부에 대해 가장 잘 싸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선출되었으니 그런 말도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수용한다면, 중요한 것은 의사로서의 소명과 책임도, 자존심도 아니다. 의사들의 이익과 권리, 즉 이권이 핵심이다. 국민이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의사가 똘똘 뭉치면 정부가 굴복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힘의 논리가 고개를 내민다.

현실 통제할 도덕이 필요한 시간

우리 사회가 화장을 지우면 드러나는 세 번째 민낯은 윤석열 대통령의 배우자 김건희 여사 명품가방 수수 의혹에 대한 국민권익위원회의 종결 결정이다. 정쟁이 불거질 때마다 대통령의 배우자가 불려 나오는 것도 코미디지만, 이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더 가관이다. 한편으로는 대통령 배우자에게 적합한 역할이 있다고 인정하면서도 그에 대한 합의와 규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선물과 뇌물의 차이가 아무리 미묘해도, 한 국가 최고결정권자의 배우자가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누가 봐도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권익위가 종결 결정한 이유가 청탁금지법상 공직자 배우자에 대한 제재 규정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법적으로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해석이 배우자는 선물을 받아도 된다는 걸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법이 그렇다는 이유로 현실에서 통용되는 상식이 훼손된 것은 분명하다.

현실과 사실이 우리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이상보다 훨씬 더 강력할 수 있다. 본래 ‘사실의 규범적 힘’이라는 개념은 현실의 반복되는 사건에서 규칙을 추론하여 특정 관행을 사실뿐만 아니라 규범으로 인식하는 경향을 의미한다. 정치인들이 상식과 법치를 강조하지만 실제로는 권력 투쟁을 정치의 본질로 생각하면, 권력의 마키아벨리즘이 규범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본래 현실을 무시하면 정치권력을 얻을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지만, 이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릴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이해하면 사실이 규범이 된다. “멋지게 지면 무슨 소용이 있냐. 현실의 엄혹함을 무시할 수 없다.” 이재명 대표의 이 말은 마키아벨리즘의 진수이다. 정치적 현실을 단지 선과 악이라는 도덕적 잣대로 평가할 수 없다면, 권력 투쟁이 유일한 정치의 규범이 된다. 선거로 다수당이 되었다면, 다수의 힘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게 옳다. 민주적 이상을 위해 힘의 과시와 사용을 자제하는 것은 오히려 힘의 논리를 거스르는 것이다.

그러나 유리한 현실을 규범으로 전환하는 것은 정치를 단순한 권력 투쟁으로 전락시키고, 기본 원칙을 모호하게 하는 심각한 윤리적 딜레마를 초래한다. 언제부터인지 돈과 권력은 우리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소명과 이상과 도덕은 개도 먹지 않는다고 한다. 그것이 사회적 책임을 일방적으로 강요한 유교적 유산에 대한 반발 때문인지, 아니면 구체적 현실에서 스스로 깨달은 경험적 진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가 극단적 현실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사실의 규범적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는 정치 체제에서의 부패의 제도화이다. 뇌물수수, 족벌주의와 같은 부패 관행이 너무 널리 퍼져 있으면, 그러한 관행은 비즈니스 수행의 표준 방식으로 인식된다. 공직자에게 관사와 관용차가 제공되는 게 관행이면, 그것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러한 관행은 부패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 이례적이거나 심지어 불리한 것으로 간주되어 일종의 규범으로 수용된다. 부패한 관행의 규칙성은 그것이 정치적, 경제적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측면으로 여겨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사실의 규범적 수용은 부패 퇴치를 위한 노력을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이러한 관행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종종 현실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소외되거나 배제되기 때문이다.

우리 정치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통치방식은 그대로다. 야당의 입법권 독주에 대통령이 거부권으로 맞서는 현실이 반복되면, 정치는 본래 권력 투쟁이라는 인식이 굳어질 것이다. 비윤리적인 통치의 악순환을 영속시키고 민주적 발전을 방해하는 이상한 현실에 대응하려면 기존 관행에 대한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고 단순한 현실의 규칙성을 초월하는 윤리적 원칙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현실을 통제할 도덕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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