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건희 여사, 선을 넘으셨습니다

2024.07.15 15:17 입력 2024.07.15 19:57 수정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민주주의진흥재단에서 열린 북한인권 간담회에서 북한 억류 피해자와 유족, 탈북민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윤석열 대통령 배우자 김건희 여사가 지난 11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민주주의진흥재단에서 열린 북한인권 간담회에서 북한 억류 피해자와 유족, 탈북민 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합뉴스

스포일러는 있었다. 대선 직전인 2022년 1월 공개된 7시간45분가량의 <서울의 소리> 녹취록이다. 김건희 여사는 말했다.

“내가 정권 잡으면 거기(서울의 소리)는 완전히 무사하지 못할 거야.” “우리 남편은 바보다. 내가 다 챙겨줘야지 뭐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남편’도 ‘우리’도 아니고 ‘내가’ 정권을 잡을 거라고 했다.

이번엔 취임 후다. 최재영 목사에게서 ‘디올 백’을 건네받던 날(2022년 9월) 발언이다.

“막상 대통령이 되면 좌나 우나 그런 거보다는 진짜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게끔 되어 있어요. 이 자리가 그렇게 만들어요.” ‘이 자리’에 ‘퍼스트레이디 자리’를 넣어보면 어색하다. ‘대통령 자리’를 넣어야 어울린다.

2024년 1월. 한동훈 당시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 보낸 문자(텔레그램 메시지)다.

“대통령과 제 특검 문제로 불편하셨던 것 같은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부모가 자식 대신, 어른이 아이 대신, 상사가 부하 대신 사과하곤 한다. ‘우리 OOO가 어려서(뭘 잘 몰라서, 초보여서) 실수했는데,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식이다. 왜 퍼스트레이디가 대통령 대신 사과하나.

“요 며칠 제가 댓글팀을 활용하여 위원장님과 주변에 대한 비방을 시킨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너무도 놀랍고 참담했습니다. 함께 지금껏 생사를 가르는 여정을 겪어온 동지였는데(중략) 결코 그런 일은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은 정치적 인화성이 크다. 우선 ‘댓글팀’. 퍼스트레이디가 여론조작을 시도했다면, 사과로 끝날 일이 아니다. 수사받을 사안이다.

‘동지’ 역시 문제적 표현이다. 김 여사와 한 전 위원장은 어떻게 동지가 됐나. 다시 녹취록을 뒤져보자. 서울의 소리 기자가 ‘제보할 게 있다’며 한동훈 당시 검사장의 전화번호를 묻는다. 김 여사는 답한다. “그럼 (제보할 내용을) 나한테 줘. 아니 나한테 주는 게 아니라 내가 (제3자 연락처를) 보내줄 테니까 거기다 해. 내가 한동훈이한테 전달하라고 할게.”

윤 대통령의 검찰총장 시절 법무부 징계결정문에는 “한동훈은 2020년 2월 5일~4월 30일 카카오톡 메시지를 징계혐의자 처(김 여사)와 332회 주고받았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둘은 오랫동안 동지 관계였다고 봐야 한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한동훈(왼쪽)·원희룡 후보가 15일 충남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대전·세종·충북·충남 합동연설회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국민의힘 당대표 선거에 출마한 한동훈(왼쪽)·원희룡 후보가 15일 충남 천안 유관순체육관에서 열린 대전·세종·충북·충남 합동연설회에서 박수를 치고 있다. 연합뉴스

“남편이 대통령이 돼도 아내 역할에만 충실하겠습니다.” 2021년 12월 김 여사는 허위 이력 논란 관련 기자회견에서 약속했다. 약속을 어긴 건 잘못이다. 하지만 <서울의 소리> 녹취록을 통해 그의 정치적 욕망은 백일하에 드러났다. 시민이 스포일러를 놓쳤거나 외면했을 뿐이다.

윤석열 정권 초기, 다른 언론사 기자에게서 “김 여사와 메신저로 대화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독특한 스타일이구나, 사업을 오래 해서 그런가보다 하고 넘겼다. 독특해서가 아니었다. 김 여사는 정치를 하고 있었던 거다. 그러니 봉하마을 방문과 해외 순방에 지인을 동반하고, 팬클럽에 사진을 보내고, 측근들을 대통령실에 심었던 거다.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 사건 공범인 이종호 전 블랙펄인베스트먼트 대표가 ‘VIP를 상대로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 구명 운동을 하겠다’는 취지로 말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이 전 대표는 김 여사의 주식계좌를 관리한 것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VIP 정체를 두고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이라 했다가 “김 여사를 뜻한 것이었지만 허풍이었다”고 말을 바꾸는 등 오락가락하고 있다.

해병대원 채 상병 순직 사건은 가장 예민한 국정 현안이다. 대통령실에서 구명 로비 관여 의혹을 즉각 부인한 이유도 그래서일 터다. 하지만 부인한다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 개입 의혹은 여기에 비교하면 ‘소소한’ 사안에 불과하다. ‘임성근 구명 로비 개입 의혹’과 ‘댓글팀을 통한 여론조작 시도 의혹’ 두 가지는 반드시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대기업 CEO의 배우자는 경영에 관여할 수 없다. 검찰총장 배우자는 수사에 개입할 수 없다. 하물며 대통령 배우자라면 더 엄정하게 선을 지켜야 한다. 부부 사이 통상적 조언을 넘어 스스로 주체가 돼 공적 업무에 관여해선 안 된다.

김 여사 스스로 자제하길 모두가 바랐다. 2년여가 지난 이제는 기대가 무망함을 안다. ‘문자 읽씹’ 논란이 점입가경인 가운데서도 김 여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단독 외교’를 펼쳤다.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이 설립한 한인 교회를 방문하고, 워싱턴에서 탈북민을 만나 북한 인권 개선을 역설했다.

윤 대통령이 김 여사를 자제시킬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결국 국회와 검찰,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등이 제 역할을 해야 한다. 미진하면 특별검사를 도입하는 수밖에 없다. 퍼스트레이디의 국정농단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이르기 전 단호한 조치가 필요하다.

2022년 3월 9일 주권자는 ‘기호 2번 국민의힘 후보 윤석열’을 제20대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투표용지에 ‘김건희’는 없었다.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김민아 경향신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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