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도 감각도 믿지 마라···쉽게 속는 인간

2024.07.26 08:00

페이크와 팩트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 지음 | 김보은 옮김 | 디플롯 | 544쪽 | 2만5800원

육체적으로 강인하지 않은 인간이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은 사고하고 추론하고 반성할 수 있는 지적인 능력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의 지적 능력에는 결함이 많다. 아일랜드 물리학자이자 생물통계학자인 데이비드 로버트 그라임스는 “인간은 비합리적인 유인원이며, 의심스러운 결론에 깊이 집착하고, 생각하지 않고 반응한다”고 단언한다. 그가 쓴 <페이크와 팩트>에는 인간이라는 종이 얼마나 자주 사실을 무시하고 가짜에 쉽게 속아넘어가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들이 빼곡하게 담겨 있다.

1950년대 중국에서 벌어진 유명한 ‘제사해운동’(네 가지 해로운 동물을 제거하는 운동)은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합리적 사고를 가로막아 대참사를 빚은 대표적 사례다. 공산당 지도자들이 참새를 농부들이 애써 키운 농작물을 먹어치우는 ‘혁명의 적’으로 지목하면서 1958년 중국에서 참새 사냥이 벌어졌다. 요란하게 냄비를 두드려 참새들이 땅에 내려앉지 못하도록 하는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 끝에 1년 만에 참새 10억마리가 잡혔다. 참새가 사라지면 다른 해충이 번성할 것이라고 경고한 조류학계 권위자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혀 강제노역장으로 끌려갔다. 참새 잡기 광풍은 천적인 참새가 사라지자 창궐한 메뚜기떼가 중국 전역의 곡물을 먹어치우면서 1959~1961년 사이에 최대 4500만명이 굶어죽는 거대한 비극으로 끝났다.

우리는 사실이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 1948년 미국 심리학자 버트럼 포러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의 성격을 분석한 글을 개별적으로 보여준 뒤 정확도를 점수로 평가해달라고 했다. 학생들은 5점 만점에 평균 4.26이라는 높은 점수를 줬다. 사실 포러가 학생들에게 보여준 성격 분석은 똑같은 내용이었고, 별자리 점괘에서 무작위로 선택한 문장들이었다. 그런데도 학생들 대다수가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한 이유가 무엇일까. 이는 우리가 “아주 모호해서 수많은 사람에게 해당하는 성격 설명이 자기에게만 특별하게 적용된다고 믿고 높은 점수를 매기는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포러 효과’ 또는 ‘바넘 진술’이라 부른다. 모르면 대화가 안 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MBTI도 모호한 질문으로 포러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검사법이다. 미국 심리학자 로버트 호건은 “대부분의 성격심리학자는 MBTI를 공들인 중국 포춘쿠키(운세가 적힌 쪽지가 든 과자)보다 조금 나은 정도로 여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기억이 과거에 경험한 것을 기록해두었다가 필요할 때 재생해주는 장치가 아니라 현재의 조건이나 상황에 따라 과거의 일을 제멋대로 왜곡하는 못 믿을 이야기꾼에 가깝다는 것도 문제다.

198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 맨해튼 비치에서는 유치원 설립자 버지니아 맥마틴, 유치원 운영자 페기 맥마틴 버키, 유치원 교사 레이 버키가 48명의 아동들을 321차례 학대한 혐의로 고발되는 사건이 있었다. 고발의 단초가 된 것은 전문 상담사들의 면담에서 나온 유치원생들의 증언이었는데, 상담사들의 암시 때문에 아이들은 실제로 겪지 않은 학대의 기억을 만들어냈다고 저자는 말한다. 미국 인지심리학자 엘리자베스 로프터스는 1995년 24명의 참가자들에게 어린시절 실제로 일어났던 일들 사이에 쇼핑몰에서 미아가 된 적이 있었다는 가짜 에피소드를 섞은 소책자를 읽게 했다. 놀랍게도 참가자들의 25퍼센트가 쇼핑몰에서 실제로 길을 잃은 적이 있다고 믿었으며 심지어 이야기의 세부사항을 꾸며내기도 했다. 인간의 감각도 신뢰하기 어렵긴 마찬가지다. 아무런 규칙성이 없는 무작위적 현상에서 패턴을 찾아내는 것을 심리학 용어로 ‘아포페니아’라고 하는데, 록밴드 레드 제플린의 1971년작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거꾸로 들었더니 악마와 관련된 메시지가 나왔다는 논란은 이 같은 감각의 착각일 가능성이 높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아내 멜라니아와 함께 2017년 1월19일(현지시간) 자신의 취임 기념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워싱턴 링컨 메모리얼에 도착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아내 멜라니아와 함께 2017년 1월19일(현지시간) 자신의 취임 기념 콘서트를 관람하기 위해 워싱턴 링컨 메모리얼에 도착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언론은 의도치 않게 가짜를 진짜로 만드는 데 기여한다. 저자는 기계적 중립에 대한 미국 주류 언론들의 집착이 ‘헛소리’에 권위를 실어준 사례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거론한다. 기존의 정치 규범을 모두 깨뜨리면서 등장한 트럼프의 궤변을 힐러리 클린턴 후보와 동등한 비중으로 전달함으로써 트럼프를 ‘정상적인 후보’로 포장해주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증거의 무게가 반박의 여지없이 한 방향을 가리킬 때도 완강하게 양쪽을 똑같이 가치 있다고 보도하면 끔찍한 생각과 허튼소리를 존중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게 된다.”

인간의 사고와 인식이 이처럼 오류에 취약하다면 어떻게 해야 인류가 생존과 번영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저자는 “과학자처럼 생각하고, 반응하기 전에 숙고하며, 감정보다는 증거를 따라가고, 항상 자신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사실과 증거를 중시하는 이성적 행동의 모범적 사례를 책 ‘프롤로그’에 제시해놨다.

냉전 시기였던 1983년 9월26일 미사일 조기경보 시스템을 운용하는 세르푸코프-15 벙커에 미국이 발사한 미사일 5기가 모스크바를 향해 날아오고 있다는 경보가 울렸다. 불과 몇 주 전 소련이 경로를 이탈한 대한항공 007편을 격추시켜 269명이 사망하면서 미·소간 긴장이 최고조에 달한 시기였다. 벙커 책임자인 스타니슬라프 페트로프가 경보가 울렸다는 사실을 상부에 보고할 경우 소련 지도부는 핵무기를 사용해 반격할 게 확실했다.

페트로프 중령은 경보가 오작동했다고 보고했다. 미국이 소련을 공격하기로 했다면 겨우 다섯 발을 발사했을 리가 없다는 판단, 지상 레이더가 경보를 뒷받침할 증거를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에 근거한 결정이었다. 알고 보니 그의 판단이 옳았다. 경보기에 포착된 것은 구름이 반사한 빛이었다. “이성의 끈을 꼭 붙든 영웅” 페트로프가 세계를 구했다.

[책과 삶] 기억도 감각도 믿지 마라···쉽게 속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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