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고가를 꿈꾸는 패닉바잉의 나라

2024.09.22 20:38 입력 2024.09.22 20:41 수정

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래미안원베일리는 최근 ‘국민평형(국평)’으로 통하는 전용면적 84㎡ 한 가구가 60억원에 팔렸다. 연 5300만원대(2022년 기준)인 중위소득 가구가 평생 모아도 살아생전에 사기 어려운 가격이다. 올해 서울에서 거래된 국평 아파트 거래가격 상위 10개 중 7개가 이 아파트 단지에서 나왔고, 2개는 이 아파트 옆의 아크로리버파크, 나머지 하나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에서 나왔다.

냉온탕을 오가는 정부의 대출 정책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울 아파트 시장에선 초고가 거래가 이어지고 있다. 올해 신고된 서울 아파트 매매계약 중 100억원이 넘는 거래는 14건에 달한다. 지난해 연간 100억원 이상 거래 건수(5건)의 3배가량이다. 강남3구(강남·서초·송파구)와 마용성(마포·용산·성동구)의 신축 아파트 중심으로, 비쌀수록 가격이 치솟고 있다. 서울이라고 다 같은 서울이 아니다. 신고가가 나오는 지역과 안 나오는 지역으로 나뉜다.

지방의 부동산 경기는 딴판이다. 서울 아파트 매매가가 반년 넘게 쭉 오르는 동안 지방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악성 미분양’으로 불리는 준공 후 미분양 주택 1만6000여가구 중 80% 이상이 지방에 몰려 있다. 빈집이 남아돈다.

서울 쏠림, 서울 내에서도 소위 ‘똘똘한 한 채’로 몰리는 부동산 시장의 양극화는 인구 감소와 맞물려 더 심해질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지방 대도시마다 자산가들이 몰리는 인기 동네가 하나씩은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강남3구와 마용성으로 몰려 지방의 모든 곳이 공동화되고 있다는 게 업계의 전언이다.

정부도 손놓고 있는 건 아니다. 서울의 그린벨트를 풀고, 수도권 신규택지 발굴을 통해 8만가구 규모의 주택을 짓고, 1기 신도시 등 노후계획도시 정비를 앞당겨 공급을 늘리겠다는 게 8·8 부동산대책의 골자다.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대출도 조이고 있다. 국민의힘은 지방 부동산 경기를 살리겠다며 지방 미분양주택 취득자에 대한 취득세와 양도소득세 한시적 감면, 미분양주택 취득 시 주택 수 산정 제외, 다주택자 취득세 중과 폐지, 한시적 DSR(총부채원리금상환비율) 해제·완화 등을 정부에 건의했다. 어느 정도 필요한 일들이다. 다만 공급을 늘린다고 서울 집값이 안정될지, 금융·세제 지원을 많이 해주면 지방의 부동산 경기가 살아날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당장 분당·일산 등 1기 신도시는 재건축 기대감에 집값이 오히려 들썩이고 있다. 사람들이 왜 신고가 지역으로 몰리고 ‘똘똘한 한 채’를 선호하는지를 생각해본다면 단편적, 단기적 해법에 치우쳐 있다는 우려를 지울 수 없다.

“고속철도 타고 강남까지 한 번에 오갈 수 있다.” 지방에서 SRT 개통식이 열릴 때마다 등장하는 홍보 문구다. 서울 강남 수서로 향하는 고속철도 SRT 운행은 모든 지방의 숙원사업이다. 순천에서, 남원에서, 진주에서 SRT를 타고 강남에 도착한 사람들이 향하는 곳은 인근의 대형종합병원, 유명 입시학원, 문화시설들이다. 좋은 의료시설, 상위권 대학 진학률을 높여주는 학원, 양질의 일자리, 다양한 경험과 기회를 찾아 강남으로 몰려드는 수요를 분산시키지 않고선 서울 주변의 그린벨트를 다 풀어 아파트로 채우더라도 서울 집값 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긴 어렵다.

얼마 전 국제결제은행(BIS)은 한국의 높은 가계부채 수준이 경제성장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채를 통한 성장이 어느 정도까진 작동하지만, 부채가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많아지면 역효과를 낸다는 것이다. 과도한 가계부채로 원리금 상환 부담에 허덕이는 가계의 소비 여력이 떨어지고 이것이 자영업자 위기, 내수 부진으로 이어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뼈아픈 지적이다. 시중 자금이 더 생산적인 투자로 흘러가지 않고 건설과 부동산에 집중된 상황을 정상이라 할 순 없을 것이다.

집값 급등과 양극화는 경제 성장을 좀먹을 뿐만 아니라 세계 최저 수준인 출생률과도 직결된다. 결혼을 하고도 자녀 계획을 세우지 않는 이유가 한국 사회에선 너무나도 많겠지만, 세계 주요 도시들과 비교해도 너무나 높은 집값은 무시 못할 요인이다. 강남3구와 마용성에 쏠린 수요를 분산시키기 위해선 지방의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 상대적 박탈감을 키우고 노동의욕을 잃게 만드는 양극화, 모든 기회와 가능성이 한 곳에 몰려 있는 구조적 문제를 풀지 않는다면 영끌과 패닉바잉은 반복될 것이다.

이주영 경제부문장

이주영 경제부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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