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에서 국민연금 자동조정장치가 뜨거운 주제로 부상했다. 정부는 이 장치가 국민연금의 미래 재정 안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강조하고, 야당은 은퇴 후 연금액을 대폭 삭감하는 조치라고 비판한다. 두 주장 모두 사실이다. 재정이 안정되는 만큼 급여는 낮아질 것이다. 중요한 건 지금 이 논의가 필요한가이다. 나는 시기상조라고 생각한다. 이번 연금개혁에선 상호 공방만 벌일 이 주제는 제외하고 우선 시급한 과제에 힘을 집중해야 한다.
자동조정장치는 경제, 인구 환경이 변하면 이를 자동으로 국민연금 제도에 반영하는 수단이다. 국민연금 발전 방향에 대해 저마다 입장이 다를 수 있지만, 경제, 인구는 국민연금 제도 밖 객관적 변수다. 공적연금 철학·가치와 무관하게 진행되는 연금제도 밖 변화는 정치적 입장을 떠나 그대로 연금개혁에 포함하자는 취지를 지닌다. 저성장, 초고령 시대에 연금개혁의 탈정치화라 볼 수 있다.
자동조정장치는 이미 외국 연금개혁에서 주요 흐름으로 자리잡았다. OECD 회원국 38개국 중 24개국이 도입했고, 앞으로 더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만큼 유용성이 인정된 것이다. 경제의 저성장이 지속되면 가입자 소득증가가 더뎌 보험료 수입이 저조해지고, 저출산이 심화되면 가입자가 줄어 역시 수입이 감소할 것이다. 반대로 기대여명이 길어지면 연금 수급기간이 늘어나 급여 지출은 증가한다. 결국 자동조정장치는 저성장, 저출산·고령화 추세에서 가입자 부담을 늘리거나 수급자 급여를 낮추는 역할을 할 것이다.
외국에서 가입자 혹은 수급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하는 자동조정장치가 어떻게 도입될 수 있었을까? 공적연금의 지속 가능성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을 논할 수 있겠지만, 더 중요한 건 연금 선진국들이 자동조정장치를 도입할 수 있는 제도 여건을 미리 마련해 놓았다는 점이다. 자동조정장치는 연금의 재정안정을 자동으로 모색하는 수단이므로, 현재 제도 내부에 기여와 급여의 수지불균형이 존재한다면 이 요인마저 겹쳐 그 조정 폭이 무척 클 수 있다. 이러면 시민들이 자동조정까지 결합된 기여 혹은 급여 변화를 수용키 어려울 수 있다. 자동조정장치가 운영된다는 건 그만큼 현재 연금재정 상태가 안정적임을 뜻한다. 앞으론 점진적으로 경제, 인구 변화만 자동 반영하는 선에서 제도를 관리하면 된다.
반면 우리나라 국민연금은 미래 연금재정의 불안정이 매우 심하고 국민연금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도 약하다. 이런 상황에서 자동조정장치가 도입되면 향후 급여 삭감에 대한 불안이 더욱 증폭될 수 있다. 이미 국정감사에서 자동조정장치에 따른 연금액 하락이 논란의 중심으로 들어왔다. 이러면 정부 연금개혁안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인상, 출산크레딧 확대, 기초연금 인상 등 일부 보장성 강화 내용을 담고 있지만 종합적으로는 ‘더 내고 덜 받는’ 방안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정부안에 대한 비판은 거세지고 모처럼 여야가 의견을 모은 보험료율 인상마저 유실될 수 있다.
현재 국민연금은 제도 내부 수지불균형과 인구 초고령화라는 어려운 환경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연금개혁의 목표가 한번에 달성될 수는 없다. 노무현 정부 이후 17년 만에 진행되는 국민연금 개혁의 계기를 놓쳐서는 안 된다. 우선 정부 개혁안에서 국민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 기초연금 40만원 등을 추려 시급한 개혁을 먼저 이루고, 국민연금 자동조정장치, 퇴직연금 개혁 등은 다음 테이블로 넘기는 지혜가 요청된다.
그러면 1단계 개혁에서 논점은 사실상 보험료율 인상에서 연령대별 차등만 남게 된다. 정부는 차등보험료율 방안에서 지적된 두 과제, 즉 과거 가입기간이 짧아 국민연금 혜택이 적음에도 빠른 보험료율 인상이 적용되는 경력단절 혹은 불안정 취업자를 위한 보험료 특례 감면, 그리고 한 살 차이로 보험료율 인상 폭이 커지는 문제를 해소한 수정안을 제시하고, 시민사회와 정치권은 차등보험료율에 대한 원포인트 집중 토론을 벌이자. 연금개혁에서 차등보험료율이 절대선, 절대악은 아니므로 여론의 흐름을 감안해 국회가 도입 여부를 결정하면 된다. 이러면 올해 정기국회에서 연금개혁의 첫 매듭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번에 정부가 단일의 연금개혁안을 제시한 건, 내용의 평가를 떠나, 후속 논의를 구체적으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서 전향적인 일이다. 이제 한발 더 나아가자. 정부는 자동조정장치 도입을 제외하고 차등보험료율을 보완한 수정개혁안을 제시하라. 이는 정부안의 후퇴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로 향해가는 적극적 조정이다. 그리고 국회는 이를 받아 연내에 연금개혁의 첫 단추를 끼워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