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탐험가 앤드루스가 ‘귀신고래’ 찾은 곳
‘고래문화마을’ 속 번성했던 포구 풍경 한눈에
‘웨일즈판타지움’ 빌딩 숲 미디어아트 황홀경
‘박물관’ 12m 브라이드고래 실물 골격도 눈길
동경의 대상이자 희망의 상징인 고래. 수십 년 전만 해도 우리 바다에도 희뿌연 물기둥을 내뿜는 고래가 많았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 마구잡이로 이루어진 남획 때문이다. 이제 고래는 다큐멘터리에서나 볼 법한 소재가 되었고, 아이들은 머나먼 태평양 바다에서나 볼 수 있는 동물로 여긴다. 사라진 고래 이야기를 품은 곳, 울산 장생포를 찾았다. 고래잡이 마을에서 고래 테마 관광지로 완벽하게 거듭난 독특한 여행지다.
‘고래’ 대신 관광객들이 찾는 마을
고래잡이는 선사시대부터 있었던 전통적인 수렵 활동이었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그림이 이를 뒷받침하며 <조선왕조실록>에도 연산군이 고래를 사로잡아오라 명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럼에도 국내에 포경이 상업화된 건 구한말부터다. 러시아와 일본이 불을 붙인 포경산업 중심지는 동해에 접한 장생포였다. 일제강점기 일본이 독점했던 우리나라의 고래잡이는 광복 이후 조선 포경주식회사가 설립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이때도 장생포가 중심인 것은 바뀌지 않았다.
1970~1980년대는 고래잡이가 전성기를 누리던 때였다. 당시 장생포에 20여척의 포경선이 수시로 드나들고 1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우스갯말로 “지나가던 개도 만원짜리를 물고 다닌다”고 할 정도로 번성했다. 이후 무분별한 포경으로 포획량이 줄고,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에서 상업 포경을 금지하면서 마을은 급격히 쇠퇴했다.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갈 때쯤 울산시는 장생포 일대를 고래문화특구로 지정하고 관련 인프라를 구축했다. 탁월한 결정이었다. 국내 유일무이한 ‘고래’ 테마 관광지가 탄생하면서 장생포도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 예전과 달라진 건 ‘고래’ 대신 관광객들이 모인다는 것이다.
장생포 옛 마을로 타임슬립!
고래문화특구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호황을 누리던 시절을 재현한 고래문화마을이다. 버스 정류장에 적힌 ‘장생포’ 세 글자가 시간여행의 출발을 알린다. 골목길 담벼락에는 옛 포스터와 벽보가 붙어 있다. 통통한 아기 사진에 ‘우량아 선발대회’라 써 붙인 문구가 웃음을 자아낸다. 다방에는 키 큰 남자와 팔짱을 낀 여자가 마주 보고 앉아 있다. 맞선일까, 소개팅일까. 뭔가 묘한 상황. 조형물이지만 왠지 정겹다. 복고풍 인테리어와 촌스러운 소파,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기억 너머에 묻혀 있던 추억을 불러낸다.
‘두꺼비 문방구’는 어릴 적 기억을 소환한다. 색색의 분필과 헝겊 지우개, 가위로 정성껏 오려내던 종이 인형과 장난감들이 시간을 거꾸로 되돌린다. 새까만 연탄을 쌓아놓은 연탄집과 빨간 공중전화처럼 세월 속에 사라져버린 것들도 한 자리씩 차지했다. 입간판에 적힌 ‘야간 통금 걱정 없이 춤추다 가세요’라는 말에 혹해 고고장 안을 기웃거렸다. 요란하게 쏟아지는 조명과 신나는 디스코 음악에 몸이 절로 들썩인다. 누구 눈치 볼 일도 없으니 스트레스를 풀기 좋다. 시간여행을 더 흥미롭게 즐기려면 교복 체험은 필수다. 골목 안에 교복 대여점과 사진관이 있다. 연탄불 앞에 둘러앉아 달고나도 만들어 먹어봐야 한다.
포경산업 흥망성쇠 한눈에
골목을 지나면 ‘앤드류스의 집’이 보인다.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Roy Chapman Andrews).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의 탐험가이자 고고학자이다. 얼핏 장생포와 무관해 보이지만 이 전시관에 숨은 이야기가 있다. 1912년, 캘리포니아 연안에서 자취를 감춘 회색고래를 찾던 그는 일본 포경회사로부터 동해에 ‘악마 물고기(Devilfish)’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직접 장생포를 찾아 조사하다 자신이 찾던 고래와 같은 종임을 확인하고 학계에 보고한다. 우리에게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 전해지던 존재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이다. 장생포에서 수집한 회색고래 2마리의 전신 골격도 미국으로 보냈는데 현재까지도 워싱턴과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 잘 보존되어 있다.
앤드류스의 집을 나서면 장생포의 진짜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포수의 집에 갖가지 포경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다. 포경선에서 가장 대접을 받는 이가 바로 포수였다. 명중률이 높을수록 선장보다 더 높은 대우를 받았다. 능력 있는 포수는 울산군수하고도 안 바꾼다고 했다. 요샛말로 하면 ‘갑 중의 갑’이었다. 맞은편에 있는 선장의 집은 ‘잘나가던’ 장생포의 한때를 실감하게 한다. 넓은 안방에 고급 자개농과 화장대, 재봉틀을 비롯해 미닫이문이 달린 흑백 TV가 화려한 장식처럼 놓여 있다. 벽에 걸린 새하얀 선장복이 과거의 영광을 말없이 보여준다.
돈이 모이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니 사건사고가 없을 리 없다. 울산경찰서 장생포지서도 옛 모습 그대로 꾸며놓았다. 조서 쓰면서 찰칵, 유치장 안에서도 찰칵! 벽면 한쪽에 만든 머그샷존까지 재미난 포토존이 많다보니 웃음소리가 멈추지 않는다. 장생포초등학교에서도 작은 책걸상과 풍금이 놓인 교실을 배경 삼아 맘껏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고래 해체장과 착유장은 포경산업의 흥망성쇠를 보여준다. 고래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던 노다지였다. 고기는 식재료로 팔려나갔으며 뼈는 우산대, 낚싯대 등 다양하게 활용됐다. 지방층은 램프 오일을 비롯해 비누와 화장품, 윤활유로 많이 쓰였다. 고래수염은 코르셋의 뼈대나 셔츠의 빳빳한 칼라에 사용되었고, 심줄은 로프와 끈, 활시위에 중요한 재료였다. 수많은 사람을 먹여 살린 고래지만 인간들의 욕심은 결국 이들을 멸종 위기까지 몰고 갔다. 고래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은 없는 걸까. 언덕 위에 세워진 ‘웨일즈 판타지움’은 희망 가득한 세상을 펼쳐 보인다.
반려 고래를 키울까, 고래 찾아 떠날까
웨일즈 판타지움은 지난해 문을 연 몰입형 인터랙티브 미디어 전시관이다. 울산과 고래를 테마로 5개 전시관으로 꾸며졌다. 심연의 바다를 미디어아트로 표현한 포토존을 지나 염원의 길로 들어서면 수천 년 전 울산 반구대에 그려진 암각화 속 동물들이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고래의 도시는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빌딩 숲 사이로 유유히 흐르는 환상적인 고래 떼 앞에서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다. 마치 깨고 싶지 않은 꿈처럼 깊은 여운을 남긴다. 또 다른 흥미로운 시설은 오션나리움이다. 울산 모바일 관광 앱인 ‘왔어울산’을 이용해 반려 고래 캐릭터를 만든 뒤 디지털 아쿠아리움에 공유하는 체험이다. 스크린을 터치해 반려 고래에게 먹이를 주는 등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다.
호기심 많은 여행자라면 장생포고래박물관도 들러야 한다. 국내외 포경 역사를 알기 쉽도록 구성했다. 고래수염과 골격도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12m가 넘는 거대한 브라이드고래의 실물 골격이 인상적이다.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아찔해진다. 고래바다여행선은 특별한 여행을 선물한다. 울산 앞바다를 순회하며 고래탐사에 나선다. 운이 좋다면 밍크고래나 수많은 참돌고래가 파도를 가르는 장관을 만나게 된다. 바다 한가운데서 야생 고래와 조우한 순간은 평생 잊히지 않는다.
온종일 장생포에서 보낸다면 해피관광카드가 유용하다. 고래문화마을(웨일즈 판타지움 포함)과 고래박물관, 고래생태체험관(2025년 1월27일까지 임시휴관), 울산함을 묶은 통합 입장권이다. 태화강 동굴피아도 입장할 수 있다. 고래생태체험관 임시휴관 기간에는 할인된 가격인 4800원에 판매된다. 고래문화특구 전체를 편안히 둘러보는 모노레일 코스도 추천한다. 고래박물관을 출발해 생태체험관, 고래바다여행선 선착장, 고래문화마을을 지나 다시 박물관으로 돌아오며 약 25분 소요된다. 고래문화마을에서 하차한 후 다시 탑승할 수 있다. 공중에서 내려다본 고래조각공원이 이채로운데, 실물 크기의 고래 조형물들이 금세라도 날아오를 것처럼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