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린것이 집까지 기어오멍 무신 생각을 해시크냐? 어멍 아방은 숨 끊어져그네 옆에 누웡 이신디 캄캄한 보리왓에서 집까지 올 적에난, 심부름 간 언니들이 돌아올 걸 생각해실 거 아니랴? 언니들이 저를 구해줄 거라 생각해실 거 아니라?”(<작별하지 않는다> 중)
“그들의 얼굴을 보고 싶다, 잠든 그들의 눈꺼풀 위로 어른거리고 싶다, 꿈속으로 불쑥 들어가고 싶다, 그 이마, 그 눈꺼풀들을 밤새 건너다니며 어른거리고 싶다. 그들이 악몽 속에서 피 흐르는 내 눈을 볼 때까지. 내 목소리를 들을 때까지. 왜 나를 쐈지, 왜 나를 죽였지.”(<소년이 온다> 중)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가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집중되는 가운데, 한 작가 작품에 공통적으로 쓰이는 ‘이탤릭체’에 대해 궁금해하는 독자들이 많다.
한 작가의 작품에는 정자체로 진행되다 갑자기 이탤릭체(기울임체)로 바꿔 쓴 문장들이 나오는 경우가 있다. 위의 인용한 문장도 해당 작품에서 이탤릭체로 쓰인 문장이다. 한 작가는 어떤 경우에 이탤릭체를 사용하는 걸까.
2016년 한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맨부커상 수상한 후, 신형철 문학평론가와 나눈 대담 영상을 보면 그 이유가 나온다. 한 작가는 “글을 쓰다보면 다른 사람이 잘 쓰지 않았던 걸 나도 모르게 쓰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뭔가 실험적으로 써야겠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이탤릭체를 쓰는 것도 고안을 했다기보다는 쓰다가 쓰다가 감정의 밀도가 차오르면 정자체로는 이를 담을 수 없어서 이탤릭체로 기울여 쓰게 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바람이 분다, 가라>의 한 대목을 예로 들었다. “그 소설은 들썽들썽 싸우는 소설이어야 되니까 정자체와 이탤릭체도 충돌하는 형식적인 면을 생각하게 됐다. 전통적으로 서사를 따라 흘러가는 소설이라기보다는 비명을 지르는 목소리, 끈질기게 후회하는 목소리, 규정하는 목소리, 사랑하는 목소리, 이런 것들이 계속 뒤엉켜서 싸워야 하기에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이미지에 근접하기 위해서 지금까지 쓰지 않던 형식을 쓰게 된 것이다”라고 말했다.
해당 영상에는 소설 <흰>의 영문판이 <The elegy of whiteness>로 제목이 바뀌게 된 과정도 설명돼 있다. 소설 <흰>은 태어난 지 2시간만에 세상을 떠난 한 작가의 언니에 대한 이야기다. 한 작가는 “영국의 편집자와 이 책의 제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한국에는 ‘흰’ 하고 ‘하양’이라는 두 가지 색 표현이 있다고 했다”라며 “‘하양’은 솜사탕 같은 느낌이고. ‘흰’은 그 안에 약간 근원적인 삶과 죽음의 소슬한 느낌이 있다고 설명했다”라고 말했다. 영국의 편집자는 영어로는 ‘하양’, 즉 ‘white’밖에 없다면 ‘흰’이라는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여러 제목들을 제안했다. 한 작가는 ‘The elegy of whiteness’를 쓰면 한국의 독자들에게도 설명이 되어줄 것 같다는 한국 편집자의 의견 등을 종합해 이를 선택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