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물질이 인간의 정신을 소멸시키는 행위다. 아무리 찬란한 철학·문학·역사인들 폭탄 하나로 사라진다. 전쟁에서 인도적 대우에 관한 국제협약인 제네바협약도 종잇장에 불과하다. 국가는 형법으로 개인의 복수를 금지하고 있지만, 국제사회는 국가나 단체의 복수를 금지시킬 힘이 없다. 이·팔전쟁은 이러한 약육강식의 현실을 증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에 대한 보복뿐만 아니라 이제는 헤즈볼라와 레바논으로 전선을 확대하고 유엔평화유지군 공격도 불사하며 폭주하고 있다. 그 선두에 서있는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언설에는 전쟁의 광기가 서려있다. 신정국가 건설을 위해 무소불위의 패권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 지중해와 유럽을 제패한 로마제국의 멸망처럼 힘으로는 결코 영구적인 평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교훈을 그는 잊어버린 것 같다. 이스라엘은 증오와 말살의 전쟁 신학에 기대어 자신들이 당한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폭주하는 동력은 두 가지다. 먼저 유대공동체라는 환상이다. 슐로모 산드는 <만들어진 유대인>에서 유대인들이 로마에 항거해 패했지만, 팔레스타인에서 강제로 추방된 사실이 없으며, 2000년간 유랑의 서사는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살길 찾아 세계 각지로 이주해 정착한 그들은 그 지역에서 인종이나 문화적으로 동화되었다. 시온주의자들이 자신의 땅이라 주장하는 팔레스타인은 이스라엘 왕조 멸망 후, 바빌론·페르시아·로마·비잔틴·압바스·맘루크·오스만 등 수많은 제국과 왕조의 지배하에 다양한 민족들의 거주지가 되었다. 유대종족주의나 영토 소유권은 조작된 허구다. 1920~1948년 영국의 위임통치기간에 팔레스타인인들은 유대인들의 이주를 환영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48년 5월14일 건국 이래 지금까지 이스라엘은 무자비한 폭력과 살상으로 주민들을 내쫓은 곳에 정착촌을 건설하고 있다.
다음은 국제사회의 중재로 두 국가 해법을 제시한 오슬로협정을 파기한 이스라엘을 변함없이 지원하는 미국이다. 군사적 동맹관계도 아닌 미국은 매년 수십억달러를 이스라엘에 퍼붓고 있다. 대부분 전쟁무기다. 소위 인지적 동맹은 양국을 정치·문화·심리적으로 자국민보다 더한 일체감을 발휘한다. 기독교복음주의나 네오콘의 후원, 미국·이스라엘 공공문제위원회의 막강한 로비가 작동한다. 미국은 이스라엘의 핵무기 개발도 눈감았다. 석유·가스를 포함한 미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한편 중동을 견제하는 전략상 교두보 역할을 맡기고 있다. 최근엔 사드 배치로 이스라엘의 군사적 모험까지 후견한다.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일방적 군사작전마저 용인하는 미국은 이스라엘의 ‘호구’로 전락했다. 전쟁을 지렛대 삼아 미국 대선판도마저 좌지우지한다.
이러한 동력 위에 네타냐후는 <성서>의 예언서인 에스겔서를 통해 유대의 불신앙은 물론 이방 민족들에 대한 심판,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영토 회복과 부흥을 문자 그대로 믿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의문이 생긴다. 모든 인류가 하느님의 자손이라면 현재의 무슬림들은 형제가 아닌가. 여호와나 알라는 같은 신이 아닌가. 창세기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아브라함의 자식과 권속을 “의와 공도를 행하게 하려고” 택했으며, 신명기에서 모세가 “규례와 법도가 공의로운 큰 나라”를 역설한 것은 그 지역 모든 종족들과의 평화로운 공존을 말하는 것은 아닌가. 어떻게 형제 살해와 문명 파괴를 거친 복음이 참된 복음이며 하느님 나라 건설의 절대조건이 될 수 있는가. 선민의식의 종교적 도그마가 지구촌 형제들의 평화로운 공존에 해가 된다면, 이러한 의식이야말로 정의로운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단이며 ‘악의 축’이 아닌가.
고단한 삶에 짓눌린 민중의 희망인 종교가 죄가 될 순 없다. 그것을 이용해 지상의 권력을 추구하는 정치가들이 바로 반종교적 존재들이다. 네타냐후는 그들만의 신국건설을 위한 불가피한 전쟁을 종교적 체험으로 삼고 있다. 인류는 중동의 화약고가 세계대전의 집단자살로 확산되기 전 무모한 이 욕망의 불길을 바로잡아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