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엔 떠나자…서해부터 남해까지 ‘아름다운 섬, 길을 걷다’

2024.10.19 09:00 입력 2024.10.19 09:03 수정
거문도·대청도·매물도·우이도 | 글·사진 김민수 여행작가

어렵게 맞은 가을이다. 허투루 보냈다간 후다닥 떠나갈지도 모른다는 조바심이 났다.
여행밖엔 없다. 섬이라면 더욱 좋겠다. 가장 큰 하늘을 이고 걸으며 족적을 남겨보는 거다. 그래서 골라봤다. 가장 아름다운 섬 길 4코스, 어쩌면 계절보다 선명한 추억을 만나게 될지도.

삼각산 능선에서 걸음을 멈추고 섬의 서쪽 해안을 내려다보면 날개를 펼친 매 형상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삼각산 능선에서 걸음을 멈추고 섬의 서쪽 해안을 내려다보면 날개를 펼친 매 형상의 지형이 한눈에 들어온다.

대청도…대자연과 교감하며

대청도는 백령도, 소청도와 더불어 서해 상단 끝점에 있다. 인천에서 배를 타고 4시간을 가야 한다는 부담이 있지만, 일단 한번 다녀오면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주는 섬이다.

빼어난 자연환경과 다채로운 여행 인프라를 갖춘 대청도는 걷는 내내 탄성을 지르게 될 기가 막힌 길까지 품고 있다. 매바위 전망대를 시작점으로 삼각산 정상을 찍고 서풍받이를 돌아오는 편도 7㎞의 ‘삼서트레킹’이다. 물론 삼각산의 ‘삼’, 서풍받이의 ‘서’에서 따왔다.

일단, 매바위 전망대에서 삼각산 정상까지는 비교적 가파르지만, 중턱에서 출발하니 정상까지 힘들이지 않고 오를 수 있다. 능선에서 잠깐 걸음을 멈추고 섬의 서쪽 해안을 내려다보면 삼서트레킹의 대략적인 코스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날개를 펼친 매의 형상을 닮았다. 서풍받이가 머리라면, 광난두 해안이 좌측 날개, 모래울해변의 적송 숲이 우측 날개인 셈이다.

높이 343m의 정상에서는 사구로 유명한 옥죽동 해안과 백령도가 훤히 내려다보인다. 그것뿐만 아니다. 시선은 경계 너머 북한 땅까지 달려가 꽂히게 된다. 괜스레 ‘짠’해지는 마음, 삼서트레킹을 걷는 이들이 공통으로 얻게 되는 경험이다.

길은 광난두정자각까지 편안히 이어진 후에 다시 서풍받이 구간으로 넘어든다. 서풍받이는 대청도 남서쪽에 솟은 해발 80m의 거대한 해안 절벽이다. 거센 북서풍과 큰 파도를 몸소 막아서며 오래도록 다져지다 보니 차라리 수직으로 섰다. 서풍받이의 지형은 매우 특이하다. 풍파에 직접 노출된 서쪽 면은 나무조차 자라지 않는 황량함을, 그 반대편은 초록의 식생이 자라는 분지로 대조를 이룬다.

탐방로는 압도적인 절벽의 위용에 비하면 온화한 느낌이다. 조금이라도 위험하다 싶으면 로프 펜스를 설치해 안전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곳곳에 놓인 전망대도 인상적이다. 그저 쉬어가기보다는 대자연과 교감하는 장소로 제격이다. 삼서트레킹이 부담스러운 이들은 서풍받이 구간만 돌아와도 좋다. 대략 1시간30분 동안 대청도 여행의 진수, 해안 침식지형의 결정판을 만날 수 있다.

해발 361m 우이도 상산봉에서 만난 비경. 앞바다에서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푸름의 그러데이션이 펼쳐진다.

해발 361m 우이도 상산봉에서 만난 비경. 앞바다에서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푸름의 그러데이션이 펼쳐진다.

우이도…옛길 끝 푸름에 마음을 씻고

우이도는 도초도 서남쪽에 있는 섬이다. 목포에서 오전 11시50분에 출항하는 보조항로여객선(국가가 운항결손액을 보조하는 여객선)이 우이1구 진리마을을 기항한 후, 2구 돈목마을에 도착하기까지는 3시간이 넘게 걸린다. 이토록 먼 길을 찾아온 여행객들이 1구를 제쳐두고 2구에 여장을 푸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한때 동양 최대란 타이틀을 달았던 풍성사구를 비롯, 돈목해변, 성촌해변 등 남국의 휴양지가 부럽지 않은 스폿들이 해안을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면적 10.7㎢의 우이도는 비교적 큰 섬임에도 돈목과 진리, 두 마을을 잇는 차로가 없다. 왕래하기 위해서는 배를 이용하거나 나무가 우거진 산길을 따라 2㎞ 이상 걸어야 한다. 이름도 없이 그저 ‘옛길’로 통한다.

돈목해변 뒤편을 들머리로 옛길을 걷다 보면 시멘트 벽체만 남은 낡은 집터와 돌담을 만나게 된다. 우이도 최초의 마을이라는 대초리 터다. 마지막 주민이 떠난 것이 불과 20여년 전이라는데, 세월은 뭐가 급했는지 그들의 흔적을 먼 옛날로 날려 보냈다.

몰랑 삼거리에 다다랐을 때, 이정표는 직진 진리마을, 우측으로는 삼산봉을 가리킨다. 이 순간, 흔들려서는 안 된다. 삼산봉은 우이도 옛길의 하이라이트이기 때문이다. 삼산봉 정상까지는 1.2㎞, 가파른 경사를 치고 올라야 하는 제법 고생스러운 코스다. 하지만 361m의 봉우리에는 높이보다 훨씬 더 근사한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너무도 우아한 해안과 산세의 흐름, 그리고 앞바다에서 시작해 수평선까지 이어지는 푸름의 그러데이션, 오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옵션이다. 그뿐인가. 동소우이도, 서소우이도, 비금도, 도초도 등 우이도로 다가서며 스쳐 지났을 섬들이 3D 지도앱을 펼쳐놓은 듯 또렷하게 각인된다. 최고 등급의 비경이다.

진리마을은 돈목마을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우이선창’이란 이름을 가진 옛 선창은 지어진 지 300년을 훌쩍 넘었다. 형태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국내 유일의 전통 포구시설로 알려져 있다. 한편, 신유박해로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 정약전은 당시 소흑산도라 불렸던 우이도에서 적거 시절을 보냈다.

풍경이 뛰어나 개장하자마자 백패킹의 성지로 등극한 매물도 야영장의 일출. 성수기 주말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풍경이 뛰어나 개장하자마자 백패킹의 성지로 등극한 매물도 야영장의 일출. 성수기 주말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매물도…타오르는 일출에 물들고

대매물도는 소매물도와 더불어 한려해상 국립공원 거제지구의 남단 맨 끝에 있는 섬이다. 일반적으로 매물도라 불리는 이 섬은 이웃한 소매물도의 명성에 가려 다소 저평가된 부분이 있었다. 하지만 야영장과 트레킹 코스 ‘해품길’이 알려지면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었다. 해품길은 한려해상 바다백리길의 5번째, 매물도 코스의 공식 명칭이다. 당금마을을 시작점으로 야영장, 장군봉, 꼬돌개, 대항마을을 거쳐 원점 회귀하는 5.2㎞의 순환 코스로 누구에게나 어렵지 않은 난도다.

매물도야영장은 폐교 터에 조성됐다. 워낙에 풍경이 좋아 개장한 지 얼마 안 가 백패킹의 성지로 등극해버렸다. 야영장의 전면 배경은 짙푸른 남해다. 천연잔디 위에 알록달록 놓인 텐트만으로도 백패커들이 가장 부러워한다는 #텐(트)풍(경), #섬백패킹 인스타그램 피드가 완성된다. ‘텐트 밖은 일출’이라는 기막힌 입지 조건 때문에 당연히 봄, 가을, 성수기 주말에는 사이트를 차지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다.

야영장에서 장군봉까지는 들꽃들이 어우러진 초록의 능선 길이다. 비진도, 한산도, 욕지도, 연화도 등 내로라하는 통영의 섬들을 한눈에 섭렵할 수 있다. 특히 건너편 소매물도까지는 불과 550m, 헤엄쳐 건너고 싶다는 충동이 들 만큼 가깝다.

꼬돌개는 200년 전 사람들이 매물도에 입도해서 최초로 정착한 곳이다. 초기 정착민들은 2년에 걸친 흉년과 전염병으로 모두가 사망했는데 ‘꼬돌개’는 후세 사람들이 꼬돌아졌다(꼬꾸라졌다)는 의미로 붙인 이름이다.

대항마을 해변에서 낚시꾼들의 진지함을 보았다면 다음은 당금마을로 돌아올 차례다. 두 마을 사이에는 조붓한 오솔길이 나 있다. 대항마을 어린아이들이 당금마을에 있던 ‘한산초등학교 매물도분교’를 등하교하던 길이다.

매물도에서 하루를 머문다면 해품길은 느지막하게 걷는 것이 좋다. 당금마을로 돌아오는 마지막 고갯마루에서 황홀한 일몰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매물도의 하루는 바다 위에 외로이 떠 있는 작은 섬 너머로 저문다. 바로 소지도다.

거문도 최고의 포토존인 신선바위에 오르면 수월산 해안 절벽과 거문도등대의 모습이 앵글을 가득 채운다.

거문도 최고의 포토존인 신선바위에 오르면 수월산 해안 절벽과 거문도등대의 모습이 앵글을 가득 채운다.

거문도…먼 바다까지 만끽

거문도는 동도, 서도, 고도 등 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행정과 편의시설의 대부분이 고도에 있고 여객선 역시 이곳으로 입출항하지만, 거문도 여행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서도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서도 양 끝에는 거문도등대와 녹산등대가 있다. 두 등대 사이 녹산, 음달산, 불탄봉, 보로봉(전수월산), 수월산으로 이어지는 등줄기를 서도지맥이라 하는데, 이는 거문도가 자랑하는 대표적인 트레킹 코스다. 서도지맥을 종주하려면 대략 7시간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삼호교 부근 덕촌리를 시작점으로 거문도등대까지 오붓하게 놓인 핵심 코스만 걸어도 섬과 계절의 컬래버레이션을 만끽할 수 있다.

일단 덕촌마을에서 불탄봉 정상까지는 오르막이다. 해발 0m에서 시작하는 섬 트레킹은 초입이 가장 어렵고 힘들다. 하지만, 일단 능선을 타고 나면 유유자적, 비로소 모든 풍경이 편안해진다. 불탄봉은 일제강점기에 포탄이 떨어져 불이 났다고 해서 붙은 지명이다. 청명한 가을날 불탄봉 전망대에 서면, 동도와 고도는 물론이고 거문대교 너머 초도와 손죽도의 모습까지 선명하게 다가온다.

촛대바위는 본격적인 섬 능선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이정표이다. 이때부터 능선 길은 벼랑과 바다의 경계를 탄다. 시선은 아찔하지만 길은 역시 안전하다.

돌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기와집 몰랑의 정상이다. 몰랑은 산마루를 일컫는 말이다. 남쪽 바다에서 바라보면 절벽 위 산마루는 마치 기와지붕을 씌워놓은 모양이란다. 신선바위는 거문도 최고의 포토존이다. 바위에 올라서면 수월산 해안 절벽과 매달린 거문도등대의 모습이 앵글을 가득 채운다.

거문도등대는 120년 역사를 자랑하는 남해안 최초의 등대다. 오래도록 뱃길의 길잡이가 되었던 원형 등탑은 비록 은퇴했지만, 그 모습은 건재하다. 2006년 높이 33m의 육각형 등탑이 신축된 이후 거문도등대는 더 멀리, 더 넓은 바다를 비추고 있다. 등탑 전망대에 서면 백도까지 조망할 수 있고 숙박을 겸한 체험 프로그램 이용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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