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알의 모래 속에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에서 천국을 보’듯(윌리엄 블레이크), 난파 직전의 조각배 같아도 인류를 다 싣고 거뜬하게 시간의 바다를 항행하는 게 한 편의 시(詩)다. 술과 음악에 휩싸여 일생을 보낸 김종삼(1921~1984)은 단 몇 줄의 시행에 염결한 여백을 절벽처럼 세워놓는 풀잎 같은 시인이다. 피아노 건반보다 훨씬 짧은 시, ‘대화’의 전문을 읽는다. “두이노城 안팎을 나무다리가 되어서/ 다니고 있었다 소리가 난다// 간혹// 죽은 친지들이 보이다가 날이 밝았다/ 모차르트 동상을 쳐다보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에게 인간의 죽음이 뭐냐고/ 묻는 이에게 모차르트를 못듣게 된다고/ 모두 모두 평화하냐고 모두 모두.”
아인슈타인과 모차르트의 관계에 감히 견주며, 시인을 흉내내어 이렇게 말해 볼까. 나에게 지난여름이 뭐냐고 묻는다면 매미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된 것이라고. 여름의 매미 울음은 수박과 함께 나에게 몹시도 각별한 것이었다. 땡볕 속 그 소리는 귀는 물론 입으로도 맞이하는 소리. 가령 여름철 가장 맛난 점심은 찬물에 식은 밥 말아 고추장에 풋고추 찍어 먹는 것이다. 입을 크게 벌려 순한 양념 같은 매미 소리 왕창 넣고 함께 씹는 맛!
이런 점심은 대개 혼자 먹는 것이라서 나를 고스란히 밥에 바칠 수가 있다. 이러면 울음도 정말 간장처럼 짭조름해지고, 내가 나한테 떠먹여주는 듯해서 한 끼니를 때운다는 생각에 울컥, 하기도 한다. 좋은 날엔 냉장고를 뒤져 멸치라도 꺼낸다. 말라 꼬부라진 작은 멸치. 그 먼바다에서 여기까지 오도록 끝내 잃어버리지 않은 멸치의 눈을 보다가 영 잊히지 않는 어느 다큐의 한 장면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것은 물총새의 구애행동이었다. 어느 개울에서 긴 주둥이로 쉬리를 잡은 물총새 수컷. 반반한 돌에 앉은 암컷을 유혹한다. 수컷은 꿈틀거리는 물고기를 탁탁 바위에 때려 기절시킨다. 입에 문 채 빙빙 돌려서 꼬리 쪽을 물고 머리부터 입에 넣어준다. 물고기 비늘조차 암컷의 목에 걸리지 않게 하려는 섬세한 배려라나. 그사이 정신을 다시 수습한 쉬리는 눈이 휘둥그레진 채 암컷의 캄캄한 목구멍 너머로 넘어가고. 아, 벌써 옛날, 땡볕의 기운은 사그라지고 소리의 행방은 사라지고 없다. 아아, 매미의 몰락과 함께 갑진년 나의 여름도 비로소 끝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