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어가는 가을, 삼례서 책읽기
뭘 해도 낭만적인 계절이다. 색색이 물든 나무 덕분일까. 그 변화를 놓치기 아쉽고 시간이 아깝다.창밖의 풍경을 보다 문득 든 생각. 역시 이럴 땐 기차를 타고 떠나야 한다.아, 책 한 권을 읽고 싶기도 하다. 살짝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책 한 장을 넘기다 고개를 들었을 때 붉게, 노랗게 물든 하늘이 보이는 그 찰나가 가을이니까.기차도 타고 싶고, 낭만도 채우고 싶은 욕심쟁이 여행자는 완주로 떠났다. 모든 감성을 이븐(even)하게 익혀주는 가을 여행의 목적지는 삼례다.
삼례에서 쉬어가삼(례:)
삼례는 읍이다. 오가는 이도 많지 않아 조용하다. 이 작은 동네에 삼례책마을과 그림책미술관, 삼례문화예술촌이 사이좋게 모여 있다. 덕분에 삼례역에서 내려 5~10분만 걸어도 다음 여행지에 도착한다. 기차 여행의 목적지로 삼기에 좋은 조건이다.
지금은 한가로운 마을이지만, 과거 삼례는 경제와 교통의 중심지였다. 그 기록의 시작은 고려시대다. 고려의 역로(驛路) 중 하나인 전공주도(全公州道) 소속으로 삼례역이 등장했다. 거란군이 침입했을 당시 고려 현종이 피신한 곳 역시 삼례역이라고. 조선시대에는 전북 일대 12개 역을 관장하는 중심 역이기도 했다. 교통의 중심 삼례에 철도가 개통된 건 1914년. 삼례는 일제강점기 서울과 목포를 잇는 주요 거점이자 곡물 수탈의 창구였다. 전북 지역에서 수확한 곡물은 삼례역, 군산역을 통해 일본으로 반출됐다. 최초의 역사는 1997년까지 남아있다 철거되었다. 같은 해 한옥 지붕을 가진 2대 역사가 지어졌고 14년이 지난 2011년, 현재 운영 중인 3대 역사가 들어섰다.
깨끗이 지워져 버린 1대 역사와 달리 2대 역사는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름하여 ‘쉬어가삼(례:)’. 교통의 중심지이자 가슴 아픈 수탈의 역사를 간직한 삼례의 이야기가 전시된 공간이다. 동시에 여행자를 위한 안내소이자 쉼터의 역할도 수행 중이다. 위치도 좋다. 삼례역에서 내려 삼례책마을로 가는 길목이다. 출발할 땐 삼례의 역사를 둘러보기에, 돌아올 땐 두 다리 뻗고 쉬기에 좋다.
쉬어가삼(례:)의 문을 나서면 본격적으로 여행이 시작된다. 삼례에는 오래된 창고가 많다. 일제강점기 수탈의 흔적이다. 최근까지도 저장의 역할을 한 창고들은 2010년대 들어 문화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삼례는 책이다! 삼례책마을
‘삼례는 책이다’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삼례책마을 역시 오래된 창고에 자리를 잡았다. 1926년 지어진 창고는 1970년대부터 삼례농협 비료 창고로 사용되었다. 한때는 곡식이, 한때는 비료가 쌓였던 창고에 지금은 책이 가득 쌓였다. 삼례책마을의 전신은 영월책박물관이다. 본래 영월에 있다가 2013년 삼례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세 동의 창고 건물에 북하우스, 책박물관, 북갤러리를 열었다. 2층 규모의 북하우스는 삼례책마을의 중심이자 상징이다. 외부 모습은 카페가 전부다. 그래서 북카페로 생각하기 쉽지만, 들어서는 순간 눈은 위를 향하고 입은 크게 벌어진다.
면적 495㎡, 약 150평에 달하는 2층짜리 건물은 하나의 커다란 헌책방이다. 카페는 1층의 아주 일부에 불과할 뿐. 천장까지 꽉 들어찬 책과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도열한 책의 장관이 놀랍다. 이 모든 책이 헌책이라는 건 경이롭기까지 하다. 보유 중인 책은 약 10만권. 전국 최대 규모의 민간 헌책방이다.
창고의 옛 모습은 천장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가장 잘 보이는 공간은 카페다. 공간을 채운 책과 오래된 천장에 감싸 안기는 경험은 충분히 낭만적이다. 그래도 기왕 욕심내서 왔으니 찻잔은 밀어두고 구석구석 돌아보기로 한다. 걸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나무 바닥을 누비며 책 창고를 둘러보는 데에는 제법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마음 가는 책을 읽을 수 있게 곳곳에 의자와 책상을 놓고, 세월의 흐름을 담아 벽에는 오래된 잡지와 간판을 걸어둔 덕분이다.
이름은 헌책방이지만 그저 오래된 책을 쌓아둔 곳은 아니다. 시대를 가늠할 수 없는 자료며, 박물관에서나 볼 법한 신문과 잡지, 사진이 너무나 잘 정리되어 있다. 이곳의 정체가 궁금해질 때, ‘호산방(壺山房)’이라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1983년 문을 연 고서점으로, 삼례책마을 박대헌 관장이 호산방의 운영자다.
고서 전문가가 꾸린 책마을은 그래서 더 특별하다. 한국학아카이브가 대표적이다. 한국학에 대한 고서와 각종 비도서 자료를 보유한 연구센터다. 사전 예약자에 한해 한국학의 방대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다. 관련 연구자라면 욕심이 날 만한 공간이다.
책을 좋아하는 일반 방문자에겐 책박물관이 열려 있다. ‘정직한 서점’이라는 무인 서점과 전시실이 들어선 단층 건물이다.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크기와 깊이가 꼭 비례하지만은 않는 법. 시간의 흐름에 따라 소복하게 쌓인 책 냄새가 설렘을 안긴다. 바래고 낡은 종이 내음에 두근거리는 이라면 쉽게 벗어나기 힘든 공간이다. 박물관 안쪽에선 시기마다 특별 전시가 열리니 전시 중이라면 놓치지 말고 함께 들러보자.
그림책이 작품으로, 그림책미술관
삼례책마을에서 나와 또 다른 양곡창고로 향했다. ‘양곡 안전 관리’와 ‘불조심’이 커다랗게 적힌 미색의 건물은 영락없이 쌀 창고지만, 그 정체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그림책에 특화된 전문 미술관이다. 2021년 개관한 미술관 이름은 그림책미술관. 특별한 꾸밈말이 없어 담백하다.
언제부터였을까, 그림책에 손이 가지 않게 된 건. 어린 시절에서 멀어지는 속도와 비슷하게 그림책에서 조금씩 멀어졌다. 그렇게 잠시 잊고 살았다.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삽화가 주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지.
미술관이라는 명칭답게 이곳에서 그림책 속 삽화는 작품이 된다. 한 권의 책, 한 명의 삽화가를 주제로 열리는 기획 전시는 서울에서도 접하기 힘든 높은 퀄리티를 자랑한다. 미술관에서 소중하게 수집한 원화를 전시하는 덕분이다. 동물의 털, 풀잎의 맥 하나하나가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만 같다.
2층의 상설 전시는 무려 빅토리아시대 그림책 3대 거장의 작품들을 선보인다. 영국의 삽화가 월터 크레인, 그림책계의 노벨상 ‘칼데콧상’으로 익숙한 예술가 랜돌프 칼데콧, 일러스트레이터 케이트 그리너웨이가 그 주인공이다. 단순히 내용의 이해를 돕는 수준을 넘어 삽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만들어낸 이들이다.
1800년대 후반부터 1900년대 초반에 걸쳐 그려진 당시의 삽화들은 하나같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그래서일까. 그림책미술관은 아이들보다 어른들이 더 좋아하고 반가워한다.
동심을 자극하는 조형물과 아이들을 위한 그림책 그리고 어른들을 위한 굿즈까지 빠짐없이 즐겨보자. 국내 유일의 그림책 미술관이라는 수식어에 걸맞은 수준 높은 구성에 감탄이 나온다.
여행지 ‘삼례’의 시초,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역 인근에서 가장 큰 규모의 곡물 창고는 촌(村)이 되었다. 그림책미술관에서 걸어서 5분, 가을 색으로 물든 시골길을 감상하다 보면 2013년 문을 연 삼례문화예술촌이 나온다.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창고로 이루어진 동네, 삼례의 시초가 된 곳이다.
1920년대 목조 건물과 벽돌 건물은 그 모습이 잘 보존되어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완주 구 삼례 양곡창고’라는 이름으로다. ‘협동생산 공동판매’와 같은 문구도 지우지 않은 채 그대로다. 곡식이 맛있게 익는 계절과 잘 어울린다. 열 채에 달하는 각 창고는 현재 총 네 개의 전시관을 비롯해 공연장, 카페, 매점, 사무실, 창고로 운영 중이다. 전시관이 여러 개라 헛걸음을 할 염려가 없다. 언제든 마음 편히 들러 감성지수를 채우고 가기 좋다는 뜻이다.
주말에 간다면 공연과 체험을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오는 12월까지 일요일마다 공연이 진행된다. 일요음감회와 역사마당극,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공연이 열린다. 기차로 시작해 책과 그림을 거쳐 음악으로 마무리하는 가을 여행, 이 정도면 ‘이븐하게’ 익은 낭만을 맛볼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