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난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재난은 ‘남의 일’이에요.” 몇해 전 대구지하철참사 20주기를 앞두고 참사 유가족이 내린 재난의 정의다. 20년이 넘게 여전히 싸우는 유가족에게는 싸움이 치유의 과정이자 생존자를 괴롭히는 또 다른 고통이 각인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싸우는 시간이 아니었다면 온전하게 살아가기 힘들었겠지만, 또 그렇게 싸워서 베인 상처에서 계속 피가 흐르는 거 같아요.”
‘남의 일’인 재난 피해자가 늘어날 때마다, 우리 사회에서 재난은 ‘나의 일’로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을까? 확실히 코로나19 팬데믹을 지나오고, 기후위기가 현실의 위기로 인식되면서 ‘재난의 일상화’에 대한 위기인식은 높아진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일’로 인식되는 재난이 모두의 안전한 권리, 평등한 안전권을 곧바로 요청하지 않는다. 이번에는 ‘나의 일’이 된 재난이 ‘남의 재난’에는 무관심할 뿐만 아니라, 개인의 안전을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강화하는 근거가 된다. 코로나19로 드러난 사회적 불평등은 더 가난한 자들이 더 많이 사망하거나 경제적 생존을 위협받는 ‘재난 불평등’을 강화했고, 코로나19 이후에도 여전히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한국사회는 ‘IMF 위기’와 ‘코로나19’라는 가장 광범위한 고통과 외상(트라우마)을 남긴 재난의 일반적 경험을 거치면서 역설적으로 삶의 불안정성과 불안전성을 모두 개인의 몫으로 돌리는 사회가 되어버렸다. 그 핵심에는 오직 개인의 안전을 약속하는 국가가 자리한다. 역대 정부가 안전을 강조할수록 공동체의 삶을 위협하는 위험에 대한 공포와 불안만 커지는 것은 국민들의 위험인식이 지나치게 과잉화된 비과학적인 대중심리의 결과가 아니다. 모두의 평등한 안전권이 보장되지 않은 채 개인의 안전만을 약속하는 국가에서 공동체는 ‘나의 안전’과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다수의 위험’으로 양분된다. 거기에서 빠져나가는 것은 ‘이웃과 나의 평등한 안전’인 셈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두 번째 핼러윈이 곧 돌아온다. 핼러윈은 이태원 참사라는 외상적 사건과 함께 반복될 것이다. <재난 이후, 사회>에서 김현준은 “외상은 때로 건설적이고 때로는 파괴적인 양면성을 띤다”며, 외상을 야기한 사건을 인정하고 치유의 과정 안에서 반복하는 힘은 한 사회의 새로운 규범과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씨앗이 된다고 말한다.
현대사회에서 재난을 완전하게 벗어난 시간은 없다. 오직 재난과 재난 사이, ‘간재’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런 시간 안에서 외상은 하루빨리 벗어나야 할 부정적 증상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적 규범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 단 한 번도 만들어내지 못한 ‘평등하게 안전하게 생존하고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권리’, 안전권은 신자유주의를 넘어 새로운 사회체제를 상상하는 주춧돌이 될 수 있다.
참사와 축제, 이태원과 핼러윈, 죽음과 삶이 함께 섞이고 노래할 수 있는 시간이 온다. 살아 있는 우리에게 재난은 무엇일까? 삶에서 죽음을 분리하려는 순간, 죽음은 온전히 애도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삶 역시 제대로 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신자유주의는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만큼, 죽음 역시 쓸모없는 것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