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스키발레단 수석무용수 김기민
파리오페라발레단 에투알 박세은
14년 만에 ‘라 바야데르’로 한 무대
발레리나 박세은(35)이 예원학교에 다니던 시절, 발레리노 김기민(32)은 초등학생이었다. ‘꼬맹이’ 김기민은 ‘누나’에게 춤추자며 따라다녔지만, 기회는 없었다. 박세은은 말했다. “저도 아기를 키워서 알지만, 그 나이대 한두 살 차이는 정말 크잖아요. 그때 기민이는 그저 ‘애기’ 같았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그 애기가 어른이 돼서 이렇게 같이 춤을 추네요.”
세계 최정상급 발레단인 마린스키발레단의 수석무용수 김기민과 파리오페라발레단의 에투알(별·수석무용수) 박세은이 14년 만에 함께 춤춘다. 둘은 10월30일~11월3일 서울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공연하는 국립발레단 <라 바야데르> 무대에 선다. 인도 사원의 무희 니키아와 전사 솔로르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그린 대작 발레다. 김기민은 솔로르, 박세은은 니키아 역을 맡아 11월1·3일 두 차례 함께 공연한다. 김기민과 박세은이 27일 예술의전당에서 기자들과 만났다.
“‘우주대스타’와 공연하다니 영광이에요. 저 파리에서 ‘기민 킴이랑 공연한다’고 자랑하고 왔잖아요. 저희가 누레예프를 보며 꿈꿨듯이 요즘 세대는 기민이를 보면서 자라고 있어요.”(박세은)
“파리오페라발레단이 유독 외국인을 안 뽑거든요. 거기 처음 들어가서 에투알까지 올라가 한국인 입단의 길을 뚫어준 사람이 누나예요. 어렸을 때부터 따라다닌 누나여서 너무 자랑스럽습니다.”(김기민)
무대에서 둘의 첫 만남은 2009년 국립발레단 <백조의 호수>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김기민은 당시 17세에 주역으로 파격 발탁됐다. 이듬해 발레협회의 <돈키호테>와 유니버설발레단 <라 바야데르>를 마지막으로 둘은 함께 춤출 기회를 얻지 못했다. 박세은은 파리로, 김기민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났고, 이후 둘은 발레계 최고 영예인 브누아 드 라 당스까지 수상한 세계적 발레 무용수로 자리 잡았다.
“14년 전에 많이 싸웠어요. 그때는 경험이 없다 보니 내 욕심이 많았거든요.”(김기민)
“전 ‘이 정도면 됐다’ 싶은데, 기민이는 자꾸 ‘누나 한 번만 더 해보자’고 해서 굉장히 힘들었어요. 보통 파드되(2인무)에서 여자가 편하면 끝인데, 기민이가 오히려 더 하자고 하더라고요.”(박세은)
김기민은 “그때 이름을 밝힐 수 없는 남자 무용수들이 저를 굉장히 질투했다. 누나와 춤추는 것은 모든 남자의 꿈이었기 때문”이라며 웃었다.
<라 바야데르>는 마린스키의 주요 레퍼토리기도 하다. 김기민은 솔로르가 돼 셀 수 없이 춤을 췄다. 김기민은 “추면 출수록 위험하다.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지금도 매번 작품을 할 때마다 새로 연구한다”고 말했다. 박세은은 “정답을 아는 사람과 춤추는 기분”이라고 화답했다.
둘 다 해외 발레단 소속으로 바쁜 날을 보내고 있지만, 한국 무대에도 시간 나는 대로 서려 한다. 김기민은 “한국에 올 때 목표는 ‘춤을 잘 안 추는 것’”이라고 역설적으로 말했다. “고국 무대에 올 때마다 좋은 모습만 보여드리고 싶은 욕심에 올리는 작품이 한정적이 된다”는 이유에서다. 관객이 익숙해하고 좋아하는 작품만 공연할 게 아니라, 낯선 작품도 올려야 한다는 것이 김기민의 생각이다. 박세은도 “평양냉면도 다섯 번 먹어봐야 맛을 안다”고 비유했다.
김기민은 “카메라 앞 연기와 무대 위 연기는 다르다. 카메라 앞에선 ‘안 했던 걸 시도해보겠어’라고 할 수 있지만, 무대에선 ‘내 안의 솔로르’가 없으면 평생 그 춤을 못 출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누나는 니키아에 정말 잘 어울린다. 내면도 그렇고 테크닉도 정말 좋다”고 덧붙였다. 박세은은 “기민이의 솔로르를 보면 ‘내가 뭘 본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2018년 파리 공연에선 등장하는 순간 ‘헉’ 했다”고 표현했다.
둘의 활약 이후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한국 발레 무용수들이 잇따라 나오고 있다. 파리오페라발레단만 해도 박세은 이후 여러 명이 입단했다. 마린스키엔 김기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전민철이 입단을 앞두고 있다. 박세은은 “요즘 후배들은 기술적·신체적으로 저희 때보다 훨씬 좋다. 조언할 말이 없다. 다만 복도에서 마주쳐 힘든 일을 토로하면 ‘토닥토닥’해 주면서 얘기 들어줄 뿐이다. 예술은 각자가 정답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김기민도 “나중에 ‘선생님’이 되는 게 가장 두렵다. 남의 인생을 조종하는 것 같기 때문”이라며 “다만 10대엔 꿈을 하나만 가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마린스키 주역이 되겠어’라는 꿈을 꾸기보단, 조금 더 여러 가지 방향성을 가질 수 있게 어른들도 역할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