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출신 화가 남전 허산옥, 주류 미술계·미술사가 찍은 ‘낙인’ 떼내다

2024.10.29 17:13 입력 2024.10.30 20:07 수정

미술 작가·평론가 60여명, ‘람전 허산옥 탄생100주년 기념전’ 마련···“잊혀진 예술세계 조명”

전시공간 ‘d/p’서 30일 개막…채색화조화 등 30여점 선보여

“비주류·변방 치부돼 잊혀진 작가·작품 복권…변방 미술의 가치 성찰”

잊혀진 기생출신 화가 남전 허산옥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특별한 전시회가 30일 전시공간 d/p에서 막을 올린다. 사진은 남전 허산옥의 ‘포도’(66×43㎝,  종이, 1978,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잊혀진 기생출신 화가 남전 허산옥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특별한 전시회가 30일 전시공간 d/p에서 막을 올린다. 사진은 남전 허산옥의 ‘포도’(66×43㎝, 종이, 1978,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한국미술사에서 잊혀진 기생 출신의 화가 남전(藍田) 허산옥(1924~1993)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탄생 100년 만에 남전의 작품세계를 비로소 제대로 알리는 첫 작품전이다. 또 한국 주류 미술계가 비주류·변방으로 치부하고, 미술사에서도 망각된 작가와 작품을 주목함으로써 주류 미술계·미술사를 성찰해보는 뜻깊은 자리다.

남전 허산옥의 ‘국화’(130.6×32.5㎝, 종이, 1983,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남전 허산옥의 ‘국화’(130.6×32.5㎝, 종이, 1983,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전주 예술계의 대모’로 불리고, 영화 ‘어게인’의 모티브가 되기도 한 남전은 일제강점기와 전쟁, 분단, 산업화 등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작품세계와 실제 삶이 “한국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작가”라는 분석도 많다.

하지만 미술계, 미술사로부터 철저히 소외당하면서 그의 예술세계, 삶은 거의 잊혀진 실정이다. 근현대 시기 한국 주류 미술계, 미술사는 남성 미술가와 달리 여성 미술가들을 낙인 찍어 폄훼했다. 또 서구 미술사가 주류를 차지하면서 전통적 한국화, 특히 채색화는 변방으로 내몰았다. 미술계의 주체인 작가나 평론계, 학계, 미술시장도 서울을 중심으로 작동하면서 지방의 작가, 미술세계는 무관심 속에 방치됐다.

남전은 여성이었고, 서울이 아니라 전북 전주에서 활동했으며, 주류 미술계가 낙후된 작업으로 폄훼한 전통적 수묵채색, 채색화조화 작업을 했다. 더욱이 그는 일제강점기 권번(기생 조합) 출신이었다. 그야말로 비주류, 변방으로 내몰린 작가 중 한 명이다.

남전 허산옥의 ‘배추’(52.5×60㎝,  종이, 198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남전 허산옥의 ‘배추’(52.5×60㎝, 종이, 1987,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 소장). d/p 제공

남전 허산옥의 ‘찔레와 감’(41×31㎝, 두방지, 1986, 개인소장). d/p 제공

남전 허산옥의 ‘찔레와 감’(41×31㎝, 두방지, 1986, 개인소장). d/p 제공

잊혀진 남전을 주목한 것은 주류 미술계·미술사가 방치한 작가·작품을 통해 미술사 연구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려는 연구자들이었다. 인물미술사학회 인물미술사연구소, 미술사학자·평론가인 최열 등이 남전의 작품세계를 살폈다. 연구자들과 작가·평론가 등 60여 명으로 ‘람전 허산옥 탄신 100주년 추모 모임’이 결성됐고, 결국 작품전 개최까지 이르렀다.

30일 전시공간 ‘d/p’(서울 종로구 낙원상가)에서 마침내 막을 올리는 ‘람전 허산옥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다. 기념전은 인물미술사학회 인물미술사연구소가 주최하고, ‘람전 허산옥 탄신 100주년 추모 모임’과 전시공간 ‘d/p’가 주관한다. 비주류·변방이라는 무관심 속에 방치됐던 남전의 예술세계를 짚어보고, 삶을 살펴보는 의미 깊은 전시회다.

전시회에는 남전의 작품 30여 점이 선보인다. 그의 필력과 미적감각, 작품세계 전반을 엿볼 수 있는 수묵채색, 특히 채색화조화들이다. 사군자와 사군자에 목련과 모란·파초·포도를 더한 팔군자, 병풍그림 등도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연구센터와 개인 소장품들이 모였다.

연구자들의 집담회 등의 정보도 담긴 ‘람전 허산옥 탄생 100주년 기념전’ 포스터. d/p 제공

연구자들의 집담회 등의 정보도 담긴 ‘람전 허산옥 탄생 100주년 기념전’ 포스터. d/p 제공

‘람전 허산옥 탄신 100주년 추모 모임’ 연구자들은 남전이 “기생 출신 화가로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이룩한 미술사에서 보기 드문 작가”라고 입을 모았다. 근대미술 권위자인 최열 미술사학자는 “남전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대표적 화가”라며 “20세기 한국미술의 서사를 다양한 갈래로 계보화시킨다면 남전의 세계는 한 갈래의 정상”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남전의 예술성에 대해 “선묘가 보여주는 강건한 필력과 선명하고 섬려한 색채, 열린 공간의 쾌적한 구도” “단아하면서도 강건하고 또한 유쾌하고 투명함이 살아있는 세련된 형식에의 도달” 등을 꼽았다.

그동안 연구 성과에 따르면, 남전은 동료들과 달리 음악보다 미술을 주목했다. 전주에서 유명했던 동광미술연구소, 이광열 등이 만든 한묵회에 나가 미술을 공부했다. 특히 의재 허백련의 의재문하에 입문하며 미술가의 정체성을 확립했다는 분석이다. 1950년대에는 전국 문화예술계에서 이름난 요정(한정식집)인 행원(杏苑) 경영자로서 문화예술인들과 교류하며 행원을 문화사랑방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작업을 이어가면서 당시 작가들을 후원한 것도 잘 알려져 있다.

남전 허산옥의 ‘화조 8폭병’ 가운데 동백(왼쪽)과 등나무(1983). d/p 제공

남전 허산옥의 ‘화조 8폭병’ 가운데 동백(왼쪽)과 등나무(1983). d/p 제공

최경현 천안시립미술관장은 ‘람전 허산옥의 팔군자도(八君子圖) 연구’ 글에서 “남전은 팔군자에서 스승인 의재 허백련보다 여성의 미감을 강조했다”며 “표현기법에서는 대담한 구도와 굳건한 필법의 사용으로 호방한 남성적 기질이 강하게 드러나는 특징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김소연 이화여대 교수는 ‘람전 허산옥의 채색 문인화조화-문인화의 활달한 해석과 변용’ 글에서 “남전의 작품은 새가 등장하는 비율이 여타의 문인화조화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고 대부분 두 마리가 서로 얘기하는 모습이 자주 관찰된다”며 “참새, 머리가 흰 백두조 같은 작고 평범한 새들을 선호했다”고 분석했다.

‘람전 허산옥 탄신 100주년 추모 모임’은 29일 “이번 전시는 60여 명의 작가·이론가들이 힘을 모아 망각 속의 여성화가를 기억해내고, 미술사에 자리를 마련하며, 주류 미술의 시각에 대한 변방 미술의 가치를 성찰하는 의미가 있다”며 “그 일환으로 11월 2일 오후 3시 전시장인 d/p에서 연구자들의 집담회를 통해 남전의 회화세계를 조명한다”고 밝혔다.

d/p 측은 “동시대 예술 지형을 점검하고 비전을 찾아나가는 프로젝트인 ‘유산 연구실’의 하나로 남전 선생의 유산을 살피고 기념전을 개최하게 됐다”며 “남전의 작품을 불러내 지워져가는 유산의 가치를 돌아보고자 한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0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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