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부 최악의 폭우…실종자도 수십명 달해
고속도로 다리 붕괴에 드넓은 지역 홍수 피해
28년 만에 일어난 대재난 “기후 급변 증거”
스페인 동남부 지역에 한 달 치를 넘는 강수량이 하루 만에 퍼부으면서 최소 95명이 숨졌다. 이번 폭우는 최근 유럽 국가를 강타한 최악의 자연재해로 꼽힌다. 스페인 정부는 사흘간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30일(현지시간) AP통신과 CNN 등에 따르면 전날부터 이틀간 이어진 폭우로 스페인 말라가부터 발렌시아에 이르기까지 홍수에 따른 인명 피해가 속출했다. 발렌시아 지역에서만 이날까지 92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또 카스티야라만차에서 2명, 안달루시아에서 1명이 숨졌다. 아직 인명 피해가 전부 보고되지 않은 데다, 실종자가 수십 명에 달해 사망자는 더 늘어날 수 있다.
로이터 통신은 1996년 이후 스페인에서 가장 많은 사망자를 낸 최악의 폭우라고 전했다. 당시엔 피레네산맥 근처 마을을 폭우가 덮치면서 87명이 숨졌다. 스페인 기상청은 발렌시아 지역에서 8시간 동안 내린 비가 지난 20개월 치 강수량보다 더 많았다면서 “전례 없는 폭우”라고 밝혔다.
폭우가 집중된 발렌시아는 고속도로 다리가 무너지고 거리 전체가 흙탕물에 잠겼다. 나무가 뿌리째 뽑히며 차가 뒤집힌 채 뒤엉켜 쌓였다. 사람들이 차 위로 대피하기도 했다. 발렌시아 우티엘 마을 시장 리카르도 가발딘은 국영 RTV에 “어제는 내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며 “우리는 쥐새끼처럼 갇혔다. 차와 쓰레기통이 거리를 따라 흘러내렸고, 물은 3m까지 불어났다”고 말했다. 주민 30명이 숨진 다른 마을의 한 주민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모르겠다”며 “물이 10분 만에 마을에 차올랐다”고 말했다.
말라가 근처에선 약 300명이 탄 고속열차가 탈선했다. 다행히 부상자는 없었다. 철도 노선이 손상되면서 발렌시아와 마드리드 간 고속열차는 중단됐다. 버스와 통근 열차 등 대중교통도 마비됐다. 29일 오후부터는 항공편이 취소되며 약 1500명이 발렌시아 공항에 갇혔다가 다음날 운항이 재개되기도 했다. 현지 전력회사는 발렌시아에서 약 15만명이 전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스페인 정부는 31일부터 내달 2일까지 사흘간 국가 애도 기간을 선포했다. 구조 활동을 조정하기 위한 위기대응위원회를 꾸리고, 피해 지역에는 군인 1000명 등을 포함한 구조대를 배치했다. 페드로 산체스 스페인 총리는 TV 연설에서 “스페인 전체가 실종자 가족의 고통을 함께한다”며 “이 비극에서 회복할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자원을 투입할 것”이라고 말했다.
기상학자들은 스페인 지중해의 따뜻한 바다 위로 찬 공기가 이동할 때 발생하는 기상 현상 ‘고타 프리아’(차가운 물방울)가 이번 폭우의 배경일 수 있다고 짚었다. 나아가 기후변화의 영향이 더해져 더 심한 폭우가 내렸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고타 프리아’ 현상으로 강력한 비구름이 형성되는데, 지구온난화로 지중해 온도가 높아지면서 폭우를 더 강력하게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지중해는 지난 8월 역대 최고 기온을 기록하기도 했다.
과학자들은 인간이 만들어 낸 기후변화로 극단적인 기상 현상이 더 심해지고 오래 지속하며, 더 자주 발생한다고 입을 모아 경고했다. 영국 뉴캐슬대 교수 헤일리 파울러는 “(이번 사건은) 우리의 기후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는 점을 일깨워주는 또 하나의 경종”이라며 “우리의 인프라는 이런 수준의 홍수에 대응할 수 있도록 설계돼 있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