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욕먹이는 나오미는 말이죠···진보 지식인은 어떻게 우파 선동가가 되었나

2024.11.01 08:30 입력 2024.11.01 10:25 수정

도플갱어

나오미 클라인 지음 | 류진오 옮김 | 글항아리 | 612쪽 | 2만8000원

나오미 클라인

나오미 클라인

나오미 클라인(54)은 캐나다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다. 세계적 기업들의 불편한 진실을 파헤친 <노 로고> (1999), 공공 영역 민영화가 불러올 재앙을 경고한 <쇼크 독트린>(2007), ‘<침묵의 봄> 이후 가장 중요한 환경서’라는 평가를 받은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2014) 등 굵직한 저서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미권에는 ‘나오미’라는 이름을 가진 또 다른 유명 저자가 있다.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1991), <미국의 종말>(2007), <버자이너>(2012) 등을 쓴 미국 작가 나오미 울프(62)다. 울프는 아름다움이란 남성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비판하는가 하면 9.11 이후 미 공화당 정권의 파시즘화 경향을 경고해 진보적 페미니스트 지식인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했다. 지난 4월 작고한 홍세화 전 진보신당 대표는 2017년 출간된 <홍세화의 공부>에서 “우리가 싸우는 과정 자체가 그 싸움을 통하여 획득하고자 하는 사회의 모습을 닮아야 한다”는 울프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나오미 울프

나오미 울프

클라인의 신작 <도플갱어>는 그의 앞선 책들과 달리 개인적 이야기가 많이 담긴 비판적 에세이다. 책은 울프를 미국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으로 기억하는 한국 독자들을 당혹스럽게 하는 고백으로 시작된다.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자신과 자주 혼동하는 울프의 비상식적 언행 탓에 지난 10여년 동안 큰 스트레스를 받아왔다는 것이다.

“‘다른 나오미’ - 이제 나는 그녀를 이렇게 부른다. 지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사람들이 나와 지긋지긋하게 혼동하는, 나의 사자머리 도플갱어. 참으로 많은 사람이 나와 못 솎아내는 것 같다. 그런 그녀의 연이은 파격 행보로 나는 느닷없이 질책당하거나 감사 인사를 받거나 동정의 눈길을 받는다.”

저자에 따르면, 저술의 엄밀성은 떨어져도 비판적 열정만은 대단했던 울프는 2011년 이후 음모론자로 전락했다. 울프는 2014년 에볼라가 발생한 서아프리카에 미군이 투입된 것을 두고 에볼라를 미국으로 옮겨와 ‘집단 봉쇄령’을 강행하기 위한 음모라고 주장했다. 이슬람국가(ISIS)가 미국인과 영국인 인질을 참수한 것을 두고는 실제로 살해된 것이 아니라 미국 정부가 배우들을 고용해 꾸며낸 자작극이라고 주장했다. 울프의 황당한 주장이 반복될 수록 클라인이 욕을 먹는 횟수가 늘어났다. “내가 나오미 클라인을 존경했다는 게 믿기지 않네. 어쩌다 저 지경이 된 거야?”

결정타는 코로나19 팬데믹 국면에 찾아왔다. 울프는 백신 거부자들의 핵심 이데올로그로 부상했다. 그는 바이러스가 생물 무기라는 의혹을 제기했고, 미국의 코로나19 방역 정책을 주도한 앤서니 파우치 국립 알레르기·전염병연구소(NIAID) 소장을 사탄이라고 칭했다. 코로나19는 서구 사회를 파괴하기 위한 “세계경제포럼, 세계보건기구, 빌&멀린다 게이츠 재단, 테크 기업들과 중국공산당을 아우르는 초국적 상습범 집단의” 음모라고도 썼다. 심지어 백신 접종자가 위험한 바이러스 부스러기를 퍼뜨릴 수 있다는 억측까지 내놨다.

백신 관련 음모론은 접종과 접종 거부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못한 사람들을 접종 거부 쪽으로 밀어넣을 수 있는 위험한 주장이라는 점에서, 사회 전체에 광범위한 피해를 주진 않았던 기존 음모론과는 차원이 달랐다.

거듭된 음모론으로 트위터에서 축출된 울프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책사인 극우 선동가 스티브 배넌의 팟캐스트에 출연해 음모론을 이어갔다. 한때 ‘진보적 페미니스트’로 불렸던 지식인이 노골적으로 여성을 혐오하고 민주주의적 절차를 경시하는 ‘마가(MAGA·트럼프 극렬 지지층)’의 핵심 인물과 손잡은 것이다.

저자는 개인적인 불편함을 토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도플갱어인 울프가 왜 음모론의 세계로 미끄러져들어갔는지를 분석한다.

저자는 울프와 같은 자유주의 성향 지식인이 전체주의 우파로 넘어가는 과정을 소셜미디어 시대의 관심경제로 설명한다. 관심경제는 “정보의 옳고그름이나 선악을 가르는 게 아니라 순전히 온라인상에서 얼마나 넓은 지면을 도배한 것인지, 얼마나 많은 트래픽을 유도한 것인지를 평가한다.”

저자는 클라우트(소셜미디어에서의 영향력) 확보에 목말랐던 울프가 배넌과 손잡고 코로나19라는 ‘금광’을 발견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울프는 코로나19 음모론을 주장하는 과정에서 방역 조치를 ‘나치 통치’나 ‘아파르트헤이트’에 비유하는 극단적 수사까지 사용하는데, 저자는 “이는 종교 지도자들의 꼬드김에 넘어간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트럼프가 가치관에 어긋하는 행동-여색, 성폭행 혐의, 잔학 행위, 거짓말-을 하더라도 애써 눈감아주는 현상과 여러모로 닮아 있다”고 지적한다.

이 같은 분석의 과정을 통해 포스트트루스(탈진실) 시대 미국 진보파의 딜레마까지 드러낸다는 점이 이 책의 강점이다.

울프처럼 극우로 전향한 자유주의자들이나 배넌 같은 극우파가 제기하는 음모론은 단순히 헛소리로 치부되어선 안 된다. 코로나19가 권력자들이 세계를 정복하기 위한 음모라는 주장은 터무니없는 것이지만, “음모론의 중심에는 정의라는 관능적인 판타지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좌파로 규정하는 저자는 “정의에 대한 갈망이 일그러진 형태로 거울세계에서 다시 떠오르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라면서 약탈적·축출적 자본주의야말로 음모론이 번식하는 거처라고 강조한다.

“큐어넌(미국 음모론 집단) 신봉자들은 아이들이 피자 가게와 센트럴 파크 하부에 있는 비밀 터널을 통해 거래되고 있다고 상상한다. 그건 환상이지만 일부 주요 도시 아래에는 빈자와 병자, 약물 의존자, 사회가 버린 이들이 숨어 사는 실제 터널이 있다. 번쩍이는 라스베이거스의 불빛 아래에는 수백, 심지어 수천 명이 구불구불 뻗은 폭우 배수 터널에서 기거한다.”

[책과 삶]나를 욕먹이는 나오미는 말이죠···진보 지식인은 어떻게 우파 선동가가 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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