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이라는 정치적 리스크

2024.11.05 20:57 입력 2024.11.05 21:00 수정

[이진우의 거리두기]‘영부인’이라는 정치적 리스크

‘영부인’이 정치를 실종시키는 가장 커다란 위험이 되었다. 윤석열 대통령 임기의 절반이 지나가는데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는 김건희 여사와 관련한 정치적 논란만 보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대한민국 헌정사에서 역대 대통령의 퇴임 후 좋지 않은 삶은 많은 부분 가족과 연관이 있다. 어떤 대통령은 혁명과 쿠데타로 하야하고, 어떤 대통령은 군사반란 등으로 곤욕을 치르고, 어떤 대통령은 뇌물과 비자금 조성으로 구속되고, 그리고 어떤 대통령은 국정농단으로 탄핵당하는 ‘대통령 퇴임 잔혹사’는 근본적으로 공과 사를 구별하지 못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사적인 것의 핵심은 두말할 나위 없이 ‘가족’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과 ‘국가’의 관계를 규정한 <대학>의 8조목을 정치의 근본으로 들먹인다. “나라를 잘 다스리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그 집안을 잘 다스려야 한다.” 서양의 정치철학은 근본적으로 ‘가족’과 ‘국가’, 제가와 치국, 즉 가정을 잘 다스리는 일과 국가를 통치하는 일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고 보는데, 우리는 단순한 선후 관계 정도로 파악하는 것처럼 보인다. 가정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당연히 국가도 잘 다스릴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회는 변했고, 사회와 정치의 원리도 변했다. 성적이 좋다고 반드시 인성이 좋은 것은 아니듯이 좋은 남편이 좋은 지도자라는 법은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인성과 제가는 종종 비난의 용어로 사용된다. 인성도 좋지 않고 제가도 하지 못하는데 무슨 정치를 하느냐는 것이다.

세상을 시끄럽게 하는 대통령 부인의 사태는 단순히 수신과 제가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 부인과 가족의 문제가 반복적으로 정치적 문제가 되는 것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치적 미성숙에서 기인한다. 대통령은 일거수일투족이 정치적 의미를 갖는 공인이지만, 대통령의 부인은 엄밀한 의미에서 공인이 아니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공적 영역에 등장할 수밖에 없는 ‘공적으로 제한된 사인’일 뿐이다. 왕정 시대의 왕비는 그 선발과 생활과 지위가 공적으로 규정된 공인이었다. 왕비를 배출한 왕실의 외척 가문은 권력의 한 축을 형성하여 정치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이 선출한 것은 대통령이지 대통령의 부인이 아니다. 부인에 대한 선호에 따라 득표 또는 감표 요인이 될 수는 있지만, 우리는 대통령 부인을 공인으로 선출하지 않는다.

사적과 공적 사이 제도적 미성숙

사회가 민주화되면서 대통령 부인에 대한 국민의 기대 역시 변했다. 대통령 부인을 아직도 ‘국모’로 생각하여 인격적으로 완벽한 인물을 기대하는 사람들도 물론 있지만, 국민 대다수는 대통령이 국정을 잘할 수 있도록 ‘사적으로’ 잘 보필하기를 바랄 뿐이다. 대통령 부인은 결코 중전도 아니고 국모도 아니다. 대통령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영부인’이라는 말도 독재 시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언론이 대통령 부인의 호칭을 ‘여사’로 통일하여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다. 김건희 여사는 그저 윤석열 대통령과 결혼한 부인이라는 뜻이다.

대통령 부인의 역할과 위상이 이미 변하였음에도 대통령 부인과의 사적인 관계를 통해 권력을 잡으려는 무리는 언제든 있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권력은 속성상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을 구별하지 않는다. 공적인 권력은 끊임없이 법규와 제도를 통해 제한을 받는 까닭에 권력은 언제나 사유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나만이 권력을 가져야 하고, 나와 가까운 사람하고만 나누려는 권력의 경향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구별을 불투명하게 한다. 대통령 가까이 가려 하고, 만약 그럴 수 없다면 대통령에게 영향을 주는 사람에게 접근하려는 것은 변치 않는 권력 기술이다.

누가 대통령과 가장 가까운가? 부인과 가족이다. 공적인 정치는 사적 영역을 지배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원리에 따라 움직인다는 민주주의 원리와 가치를 내면화한 통치자라면 스스로 공사 구별에 철저할 것이다. 쓴소리, 싫은 소리도 듣고 다양한 의견을 열린 마음으로 청취하여 일을 올바로 처리하려는 민주적 통치자는 다원성이 민주주의의 절대 조건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대화와 타협을 단절하고 싫은 소리에 귀를 막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자신과 가까운 사람들에게 의존한다. 바로 이렇게 권력은 사유화된다.

우리는 공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김건희 여사 사태’를 우리의 미성숙한 정치 문화를 한층 더 발전시키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역대 대통령의 퇴임 잔혹사가 말해주는 것처럼 이 문제는 김건희 여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는 김건희 여사 디올백 수수 사건으로 입방아를 찧고, 다른 한편에서는 문재인 전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가 프랑스 순방 때 입은 ‘샤넬 재킷’에 대한 포렌식센터 감정 의뢰가 이야깃거리가 된다. 명품 백과 명품 옷이 정치를 마비시키고 있는 현실은 그야말로 코미디다. 참을 수 없는 이러한 희비극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부인의 위상과 역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 문제의 핵심은 대통령과 같은 정치 지도자의 배우자를 ‘사적 개인’으로 보아야 하는지 아니면 ‘공인’으로 보아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그들은 직위에 선출되지는 않았지만, 공식 행사에 출연하거나 사생활 보도를 통해 종종 미디어의 관심과 대중 감시의 초점이 된다. 그들이 입고 있는 옷, 먹는 음식, 말투와 걸음걸이까지 관심의 대상이 된다. 대중의 지지와 관심으로 살아간다는 점에서 셀럽과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셀럽은 자발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추구하지만, 대통령 부인에 대한 대중적 관심은 파트너의 선출된 직책 때문이라는 점에서 수동적이다. 이는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의 본질적인 긴장감을 조성한다.

‘여사’ 지위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대통령 부인은 얼마나 공적 업무에 참여해야 하고, 얼마나 사생활로 은둔해야 할까? 공적 삶에 참여하는 정도는 문화와 정치적 맥락에 따라 크게 다르다. 선출된 공직자에게 사택을 부여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그의 사생활을 위해 공무원을 이용해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문화권에서는 대통령의 부인이 ‘어느 정도’ 공적 역할을 담당하는 걸 용인하는 경향이 있다. 독일과 같은 나라에서는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을 엄격히 구별하여 사적인 개인이 공무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앙겔라 메르켈 전 독일 총리의 남편은 그녀의 임기 동안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는 공식적인 총리 관사에 살지 않았고, 그의 개인적 직업적 사생활은 아내의 정치적 역할과 분리되어 있었다. 이는 정치 분야에서 개인의 사생활을 존중하고 때때로 정치 지도자와 그 가족 주변에서 생길 수 있는 개인숭배를 피하려는 독일의 광범위한 문화적 경향을 반영한다.

우리는 대통령의 배우자 역할에 적절하고 바람직한 활동이 무엇인지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선출된 공직자인 대통령을 ‘지원하는’ 것과 배우자라는 지위를 활용해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사이의 명확한 구분을 전제한다. 예컨대 공식 행사와 관련된 공개 출연은 국가 원수의 배우자에게 적절할 수 있다. 외교 행사에 참석하고, 문화 또는 의례 행사에서 국가를 대표하고, 공익사업을 지원하는 것은 배우자 역할의 ‘비정치적’ 성격과 일치하는 활동의 예들이다. 많은 민주 국가에서 대통령의 배우자가 비정부기구나 자선사업의 명예의장으로 활동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러한 활동은 배우자가 정부 정책에 대한 공식적인 권한 또는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하지 않으면서도 중요한 사회 문제에 대해 상징적으로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는 정치적으로 부담을 주는 것으로 여겨지거나 공공 영역에서 의사 결정을 수반하는 활동은 삼가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선출에 대한 공적 책임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들의 역할은 정치적이기보다는 상징적이고 지원적인 것이어야 한다. 이러한 공사 구별을 스스로 할 수 없다면 제도적으로 강제해야 한다. ‘김건희 여사 사태’라는 대통령 배우자의 정치화가 가져올 정치적 재앙을 막으려면 무엇보다 대통령 배우자의 법적 지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그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관리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이진우 포스텍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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