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것이 있어 구시가지에 나왔다. 초겨울 토요일 밤이었다. 버스 정류장에 내려 횡단보도 앞에 서 있는데 대각선 맞은편으로부터 함성이 들려왔다. ‘하야하라’ 구호가 적힌 팻말과 촛불을 든 사람들이 긴 행렬을 이루어 제주시청 건너편 골목으로 들어서는 중이었다. 신호등이 바뀌길 기다리던 한 할아버지가 그쪽을 보더니 “와, 데모 크게 하네” 혼잣말하셨다. 그러자 옆의 할머니가 단호한 목소리로 “저건 데모가 아니라 집회지. 촛불집회!” 정정하며 “그래. 저렇게라도 해야지. 요즘 나라 돌아가는 꼴을 보니 내가 속이 상해서”라고 덧붙였다. 데모와 집회가 어떻게 다르냐고 할아버지는 질문했다. 실은 나도 궁금했던 터라 귀를 쫑긋했지만, 할머니는 그것도 모르냐는 눈빛으로 남편을 말없이 쏘아봤다. 짐작건대 그분만의 언어 감각에 따르면 두 표현은 정당성의 위계를 달리했나 보다. 전자가 쿠데타라면 후자는 혁명이랄까. 머쓱한 표정을 짓던 할아버지는 “우리도 따라가 볼까?” 제안했다. 그러곤 이내 아내의 팔을 잡아끌며 호기롭게 대오에 합류하셨다. “까짓것. 함께하지 뭐. 집회!”
두 분의 뒷모습을 보며 루마니아 영화 <그때 거기 있었습니까>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하야하던 16년 전 혁명의 밤에 당신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질문받은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한다. 그날 아침 아내와 사소한 일로 다투었다고. 미안한 마음에 귀갓길에 식물원에서 꽃 세 송이를 꺾어 탁자에 두었다고. 아내는 여전히 토라져 말을 안 했지만, 거울로 훔쳐보니 몰래 웃고 있더라고. 안도하며 텔레비전을 켰더니 속보가 나오길래, 자기는 겁쟁이가 아님을 보여주고자 광장으로 뛰쳐나갔다고. ‘민중 승리’ ‘혁명의 밤’ 식의 서사 대신 아내한테 멋져 보이려고 엉겁결에 거리로 나선 사소한 기억을 들려주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나도 발걸음을 돌려 행렬을 따라나설 마음을 먹은 것은.
좁은 상점 골목에 모여든 사람들은 박자에 맞춰 손뼉 치며 구호를 외쳤다. 한쪽에선 고등학생 무리가 풍자극을 표방한 희한한 굿 퍼포먼스로 좌중의 환호를 받았다. “무당의 복장이 왜 저러냐?” “서양 무당이라잖아.” “하긴. 쟤들 세대에겐 굿보다 퇴마가 익숙하지.” 등 뒤에 선 아저씨들의 목소리가 들떠 있었다. 맞은편 형광조끼를 입은 경찰들도 덩달아 웃었다. 이 정도 규모로 운집하리라 예상 못했던지 폴리스라인은 급조된 듯했고, 비닐 노끈마저 등장했다. 누구도 침통한 얼굴을 하지 않았다. 비장한 기운 또한 없었다. 저항이 이토록 자연스럽고 즐거울 수 있다니. 토요 촛불집회가 본격화되던 주였고, 그 겨울이 끝날 무렵까지 그렇게 난 매주 토요일 시청 앞으로 갔다.
지나고 나서 고백하자면 확신하기 어려웠다. ‘하야’가 어떤 변혁을 어디까지 가져올지에 대해. 무책임하고 내면이 불안정한 최고통치권자 1인을 밀어내는 데 성공하더라도 구조를 몸통으로 하고 자본을 심장으로 한, 특정 권력자나 권력집단이 아닌 권력 그 자체는 무능한 꼬리를 하나 자르고서 유지될 것 같았고 실제 그러했다. 정작 본질적 문제들은 깊숙이 감춘 채 아무렇지 않은 듯 그렇게. 가지지 못한 이와 억눌린 이는 여전히 고통받을 것이고 그 고통에 연대함은 다른 층위의 투쟁을 요하리라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날 밤에 마음이 환해졌던 것은 내가 감상적인 자여서만은 아닐 듯하다. 데모는 싫고 집회가 좋았던 할머니, 할머니에게 박력 있게 보이고 싶던 할아버지, 둘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섰던 나, 유령 분장하고 춤추던 학생, 끝나고 어디서 술 마실지 알아보던 아저씨, 현장을 통제하러 왔다가 그 일부가 된 경찰. 저마다 기대치와 청사진은 달랐겠지만,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졌으면 하며 유쾌한 저항에 합류했던 한 계절의 기억은 그 자체로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