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세강여고 3학년 ‘지연’(김도연)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처참한 성적 때문에 걱정이다. 학교에는 개교기념일에 귀신과 숨바꼭질해 이기면 수능에서 만점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다. 어느날 지연은 방송반 캐비닛에서 1998년 수능 만점 선배들이 귀신 숨바꼭질을 촬영한 비디오 테이프를 발견한다. 방송반 친구들인 ‘은별’(손주연)과 ‘현정’(강신희)까지 비디오를 본다. 이들은 종교부에서 홀로 활동하는 2학년 ‘민주’(정하담)와 힘을 합쳐 귀신과의 숨바꼭질에 도전한다.
김민하 감독이 6일 CGV에서 단독 개봉한 호러 코미디 영화 <아메바 소녀들과 학교괴담: 개교기념일>로 출사표를 던졌다. 명작 호러 영화들을 능수능란하게 변주하는 이 기발한 코미디는 웃음을 참기 어려운 작품이다. 김 감독은 지난 1일 기자와 만나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각자 다르겠지만 저는 세상의 고단함과 막막함을 잠깐 잊어보려 극장에 갔다”며 “잠시나마 삶의 괴로움을 잊고 웃을 수 있는 영화를 추구한다”고 말했다. 그래서인지 전작들인 단편 <슈퍼히어로> <빨간마스크 KF94> <버거송 챌린지>가 모두 코미디 영화였다.
사실 김 감독은 호러 영화를 싫어한다. 어린 시절에 <주온>을 보고 시름시름 앓아 한약을 지어 먹은 경험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기존 호러 영화들을 오마주(다른 작품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핵심 요소를 인용)하며 클리셰(예측 가능한 진부한 표현)를 마구 비틀어대는 <아메바 소녀들>에선 상당한 ‘호러 내공’이 느껴진다. 어둠 속에서 탁구공이 굴러오는 장면은 <곤지암>, 복도에서 귀신의 공격을 피하는 장면은 <여고괴담>에 대한 오마주다.
“무서운 건 무서운 것이고, 꿈은 꿈이니까요. 호러는 가성비 좋게 찍을 수 있으니까 ‘신인 감독은 호러를 해야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어요. 밀린 숙제 하듯이 호러들을 찾아봐서 OTT(온라인 동영상 서비스)에 안 본 영화가 없을 정도예요. 이제 기가 허해져서 더 안 봐도 될 것 같습니다. 하하하.”
정하담은 ‘독립영화계의 보석’으로 불릴 만큼 뛰어난 연기력이 검증된 10년차 배우다. 김도연·손주연·강신희는 김 감독처럼 <아메바 소녀들>로 장편영화에 데뷔하는 신인이다. 특히 김도연은 K팝 걸그룹 ‘아이오아이’와 ‘위키미키’, 손주연은 ‘우주소녀’ 출신이다. 이들은 아이돌 출신에 흔히 갖는 편견이 무색하게 ‘B급 호러’라는 의도에 맞춰 과장된 코미디 연기를 훌륭하게 소화했다.
“무조건 한 명은 잔뼈 굵은 정통파 배우, 두 명은 아이돌 출신, 나머지 한 명은 신인을 캐스팅하려고 했어요. 제가 갈 길도 바쁘지만 여고괴담 시리즈가 그랬듯이 <아메바 소녀들>을 통해 새로운 얼굴이 대중에게 발견됐으면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아메바 소녀들>은 저예산 작품이지만 치밀하게 계산된 촬영·구성으로 ‘빈티’가 느껴지지 않는다. 촬영 장소는 교실, 방송반, 강당, 복도 등 학교가 대부분이다. 카메라 1대만으로 촬영 16회차만에 영화를 완성했다. 지난해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2관왕에 올랐고, 올해 스페인 시체스판타스틱영화제, 대만 가오슝영화제, 스웨덴 룬드판타스틱영화제, 인도네시아 자카르타 필름위크 등에 초청됐다.
“처음부터 ‘빨리 찍을 수 있는 작품’을 생각했어요. 철저히 필요한 컷만 찍어서 적은 회차지만 쫓기듯이 촬영하진 않았죠. 찍은 장면은 95% 이상 사용해 버린 장면이 거의 없었어요. 제한된 환경에서 리듬감을 나름대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마냥 무섭고 웃긴 영화가 아니다. 무한 경쟁 사회에서 발버둥치는 아이들을 한 발짝 떨어져 제3자의 시선으로 보게 한다. 관객을 인물에게 몰입시키는 ‘클로즈업 숏’(가까이서 촬영)으로 찍을 법한데도 ‘롱 숏’(멀리서 촬영)으로 찍거나 감정적인 음악을 뚝 끊어버린다. 소녀들의 대사가 스크린을 넘어와 가슴을 쿡 찌른다. “이 시대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으려는 우리 모습을 봐!”
김 감독은 실제로 몇 년 전에 학업 스트레스로 투신한 학생을 목격하고 작품의 주제를 떠올렸다. 현재는 1편 ‘개교기념일’에 이어 2편 ‘교생실습’을 차기작으로 준비한다. 교생실습 학교에서 전국 모의고사 1등을 하는 소녀들이 사실 흑마술 동아리 멤버라는 이야기다.
“코미디는 토대에 시대의 슬픔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학생이 구급차에 실려 가는 모습을 봤는데 너무 슬프더라고요. 관객들이 아이들의 현실을 공감하고 응원해주시길 바라요. 은별이가 말하는 ‘너는 소중한 존재야. 꼭 기억해야 해’라는 대사를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