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 예산에서 예비비를 올해보다 14.3%나 올린 정부가 ‘국제정세 변화, 감염병 유행 가능성’ 등을 증액 사유로 제시했다. 올해 대비 ‘3.2% 증가’로 묶어놓은 내년 총지출보다 증가율이 4배에 달하는 예비비 편성 이유로는 설득력이 떨어진다. 세수 결손을 메우겠다며 지방교부세·교부금을 6조5000억원이나 줄이면서 국회가 사용 내역을 사전에 검증할 수 없는 ‘정부 쌈짓돈’은 대폭 늘리겠다는 것이다. 국회가 면밀히 따져 감액 조치하는 것이 마땅하다.
정성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5일 공개한 기획재정부 답변 자료를 보면, 정부는 예비비 증액 이유로 “미 대선 등 국제정세 변화, 재난·재해 발생 피해 증가 등 불확실성 확대, 농수산물 물가변동 등 민생지원 소요, 복지급여액 증가, 감염병 유행 가능성 등을 감안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증액 사유로 ‘감염병 유행 가능성’을 꼽은 건 정부가 본예산안에서 ‘감염병 대응 지원체계 구축 사업’ 예산을 전액 삭감한 것과 앞뒤가 맞지 않는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6일 국회에서 예비비 증액 사유로 “미국 대선 등 (국제정세) 변동 가능성”을 언급했는데, 이 역시 납득하기 어렵다. 그런 논리라면 예비비를 4년마다 증액 편성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내년 예산안에서 예비비는 올해보다 6000억원 증액된 4조8000억원으로, 특히 정부가 제한 없이 쓸 수 있는 일반 예비비는 2000억원 늘어난 2조2000억원으로 편성됐다. 2002년 월드컵, 코로나19 시기를 빼놓고 3조원대이던 예비비가 윤석열 정부 들어 4조원대로 올랐고, 내년엔 사상 최대치로 편성된 것이다.
본래는 ‘국가 비상금’처럼 꼭 필요할 때 아껴 써야 할 예비비를 윤석열 정부는 쌈짓돈 쓰듯 써왔다. 지난해 대통령 정상외교 관련 업무에 예비비 532억원을 당겨 썼고, 대통령실 용산 이전 관련 비용으로도 650억원을 써 비판을 받았다. 긴축재정 하려면 모범을 보여야 할 정부가 그런 기본조차 지키지 않는다.
국회예산정책처 분석을 보면, 영유아보육료 지원사업에 최저임금·물가상승을 고려한 단가인상분이 내년 예산안에 반영되지 않고, 육아기 근로시간 단축급여 사업 대상 자녀연령이 내년부터 오르는데도 그 증액분 역시 빠졌다고 한다. 민생 예산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는데 이토록 방만한 예비비를 책정한 것은 정상이 아니다. 국회 예산심사에서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