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극장-아라이 료지 글·그림 | 황진희 옮김 피카 주니어 | 40쪽 | 1만5000원
폭설이 내린다. 나는 따뜻한 방 안에서 친구와 아빠의 ‘나비 도감’을 보느라 정신이 없다. 노랑, 빨강, 연한 파랑, 하양 나비에 마음을 뺏긴다. 실수로 한 장이 쭉 찢어진다. 아빠가 가장 아끼는 책인데. 나는 잠시 밖으로 나와 스키를 타고 어디론가 간다. 예쁜 나비, 찢어진 책, 아빠…. 생각에 잠겨 쭉쭉 산을 타던 나는 그만 푹 파인 구덩이 안으로 빠진다.
아라이 료지가 쓰고 그린 <눈 극장>은 짧은 판타지 그림책이다. 모든 판타지가 그렇듯, 모험은 구덩이에 빠지면서 시작된다. 나는 구덩이에서 아주 작은 ‘눈 극장’을 발견한다. 갑자기 떨어진 나 때문에 놀랐는지, 손가락만 한 눈사람이 무대 밖으로 튕겨 나왔다. 나는 눈사람을 제자리에 올려준다. 눈사람들은 나를 눈 극장의 오늘 공연에 초대한다.
잠시 눈을 감았다 뜨자 이번엔 거대한 눈 극장이 앞에 있다. 발레리나와 광대 눈사람들이 등장해 춤을 추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많은 눈사람이 올라와 무대를 꽉 채우지만, 여전히 조용하다. 무대 위 거대한 ‘눈 팽이’가 돌아간다. 신이 난 나는 무대 위로 올라가 함께 노래를 부른다. “돌아라. 돌아라. 눈 팽이야.” 눈은 점점 더 많이 내린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눈 사이로 나비들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아빠가 나를 데리러 왔다. 나는 집에서 코코아를 마시며 눈 팽이를 떠올린다.
조용한 그림책이다. 주인공은 눈 내리는 날 집에 있다가, 잠깐의 모험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실수로 책을 찢긴 했지만 혼날까봐 크게 불안해하진 않고, 구덩이에 빠지는 것도 딱히 큰 고난은 아니다. 간단한 서사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아름다운 그림들이다. 특히 공연이 펼쳐지는 중반부터는 모든 장이 독립된 작품 같다.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불리는 저자의 내공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