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볏짚 걷지 마세요, 생태계에 양보하세요’…그 후 21년
“20여년 만에 철원평야를 찾은 두루미가 6배 이상 증가했어요.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며 논에 떨어져 있는 낟알을 쪼아 먹는 모습을 보면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가을걷이를 끝낸 강원 철원군의 민간인 출입통제선(민통선) 인근에 거주하는 농민들이 7일 들녘에 내려앉은 철새들을 바라보며 연신 감탄사를 쏟아냈다.
멸종 위기 야생조류인 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2호)와 재두루미(천연기념물 제203호)는 우아한 날갯짓과 고고한 자태로 ‘겨울 진객’으로 불린다.
올가을에만 3000마리 활공
군·농가, 2003년부터 ‘계약’
철원평야 개체 수 ‘5배’ 늘어
철원군과 철원두루미운영협의체 등에 따르면 지난달 중순 이후 현재까지 철원평야에 날아든 재두루미는 3000여마리에 달한다. 또 시베리아 등지에서 2000㎞ 이상 날아온 두루미도 이달부터 본격적으로 철원평야를 찾을 것으로 보인다. 철원군은 이번 겨울에 6500~7000마리가량의 두루미류가 민통선 내에 있는 철원평야를 찾을 것으로 예상한다.
철원평야에서는 두루미, 재두루미, 검은목두루미(천연기념물 제451호), 흑두루미(천연기념물 제228호)와 캐나다두루미, 시베리아흰두루미, 쇠재두루미 등 7종의 두루미류가 관찰된다.
인적이 드문 철원평야 일대가 국내 최대 두루미류 월동지로 손꼽히게 된 것은 철새들의 먹이 공급에 힘쓴 자치단체와 농민들의 노력 덕분이다.
철원군은 2003년부터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 계약’을 시행하고 있다.
이는 철원평야 농경지에 추수 후 볏짚을 수거하지 않고 그대로 놓아두는 등 철새 보호 활동을 하는 농가와 지자체가 계약을 체결하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제도다. 볏짚에서 떨어진 낟알은 두루미류의 먹이가 된다.
철원군은 올해 11억원을 들여 690여개 농가와 민통선 내 농경지 1077㏊에 볏짚을 존치하는 내용의 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단가는 1㎡당 50원으로 농가당 평균 159만여 원이 지원되는 셈이다.
백종한 철원두루미운영협의체 회장(78)은 “보통 3960㎡(0.4㏊) 규모의 논에 볏짚을 존치하면 19㎏가량의 벼 낟알이 바닥에 떨어져 두루미 70~80마리의 하루 먹이가 된다”며 “결국 1077㏊에 볏짚을 존치하면 51t이 넘는 먹이를 공급하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볏짚을 거둬 소먹이용 조사료로 팔면 더 많은 수익을 올릴 수 있지만 대다수 농민은 생태계 보호를 위해 볏짚 존치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고 한다.
21년 전 300만원으로 시작한 철원군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 계약’ 사업 규모는 11억원으로 366배가량으로 증가했다. 덕분에 머무르는 두루미류 수도 크게 늘었다. 환경부와 철원군 자료를 보면 철원 평야를 찾은 두루미류는 2004년 1069마리, 2012년 1718마리, 2016년 3155마리, 2020년 5752마리, 2023년 6573마리 등으로 지속적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볏짚 존치 사업 이후 20여년 만에 두루미와 재두루미 등 두루미류 개체 수가 5배 이상 늘어난 셈이다.
철원군 청정환경과 자연생태팀 이종욱 주무관은 “볏짚 존치 사업을 시작한 이후 땅심도 좋아지고, 두루미 개체 수가 늘었다”며 “사업 규모를 확대하는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했다.